아브라함, 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을까?

성경 이야기

아브라함, 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을까?

아들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의 믿음

2025.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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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약속, 가장 큰 시련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후손을 약속하신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창세 17,1-2)

 

그리고 사라가 주님께서 계획하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믿지 못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결국 아들 이사악을 얻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살이 되어서 갖게 된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이 사건은 아브라함 일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3일 동안 모리야 땅을 향해 걸었다. 3일은 아브라함의 생애 가장 먼 길이었고 긴 시간이었다. 그는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갈등과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전부인 이사악을 바치기로 했다(창세 22,2-12 참조).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를 바라보는 키르케고르의 해석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에게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신앙의 모범이 된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참조: 키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도서출판 치우, 2011). 키르케고르의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면에서 묵상할 가치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한 일의 위대함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을 위하여 귀한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결단은 윤리적인 의무와 모순되는 것이었고 그곳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결단을 아브라함은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행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신념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에 일찍 도착하지도, 늦게 도착하지도 않게 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라면 모리아 땅에 서둘러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절대복종에서 더 나아간 신앙(faith)으로 행동했다. 신앙은 합리적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오직 비합리적인 열정(passion)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를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라고 칭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기사는, 절대적인 의무 이행을 위해 윤리가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랑이라는 신앙의 역설

 

또한 키르케고르는 개별자는 보편에 우선한다고 말하며 이를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이라고 부른다. 보편이 되어 본 개별자는 보편을 하위의 것으로 규정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바로 개별의 목적을 위해 보편 윤리의 선을 넘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목적을 위해 도덕의 선을 넘은 다른 이야기들과 구별되며, 비슷한 경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브라함은 오직 신과 자신을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한 증오로도 해석하는 윤리적인 관점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진정 아들을 희생(sacrifice)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신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그를 지극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역설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아브라함이 보여 준 종교적 비약의 실존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주체자가 되는 유일하고 진실한 길이다. 이 실존은 심미적, 윤리적 단계를 거치면서 보편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보편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약의 과정은 자기 자신을 떠맡음이며 신과의 독대(獨對)이다. 이때 실존이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두려움과 떨림이다. 종교적 실존은 역설적인 신앙의 비약으로 성취되기 때문에 개별자로서 그의 문제는 보편자의 언어로는 전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은 역설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는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흥미롭다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

 

그러나 어떠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사악을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삶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의 행복을 바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께서는 더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순간, 오히려 갈등과 번민이 걷히고 담담해졌을지 모른다. 그를 여태까지 감싸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서는 그런 느낌 말이다. 아브라함은 사실 아들 이사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분이 필요하셔서 다시 돌려드릴 뿐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평화로워졌을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시련받는 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그것을 잘 감당하여 하느님께 인정받았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경우도 많다. 나는 언제 시련을 겪었는가? 그 시련이 나의 신앙을 어떻게 성숙시켰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믿음은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했었고, 신앙적으로도 빗나간 부분이 많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이 우리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오늘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아브라함의 삶

 

과거는 기억이라는 인간의 지성 작용을 통해 현재에 다시 재현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같은 성경 인물들은 결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있는 인물이며 나 자신인 것이다.

 

성경 속 인물들은 인간적인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붙잡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힘겨운 길을 가는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통해 희망과 위로를 얻는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장()으로, 우리는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과거부터 존재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현재에 인식하는 축복을 깨달을 수 있다.

 

신앙이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여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보여 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우리에게도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가장 큰 힘이 된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1984년 사제품을 받은 후, 다양한 성당에서 사목하며 18년간 서울대교구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을 맡고 있으며, 바쁜 사목 활동 속에서도 여러 매체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성경 속 궁금증》, 《성경 속 상징》, 《성경 순례》, 《당신을 만나 봤으면 합니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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