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작지만 빛나는 선택”에서 이어집니다.
시노드, 이미 우리 식탁 위에 차려진 풍경
‘시노드’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주교님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교황님께서 큰 회의장에 들어서시는 모습, 혹은 교회 매체를 통해 스쳐 지나가는 낯선 단어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시노드의 의미를 우리 일상의 경험과 견주어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를 떠올려 봅시다.
“아버지께서 정하셨으니 따르자.”
“엄마 뜻대로 하자.”
부모님의 결정으로 회의를 마무리할 수도 있지만, 이 결정에 가족 모두의 마음이 모아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듣고 마음을 헤아리며 함께 결론을 내린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결정 그 자체보다 함께한 경험이 더 오래 남을 것입니다. 본당의 사목협의회나 구역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부담스럽고, 어떤 분은 너무 조용해서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 말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성찰하기 시작하면 논의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때 우리는 토의에서 ‘이겨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찾아가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공동체의 경청과 식별 속에서 조용히 일치로 이끄시기에 이러한 여정 자체가 시노달리타스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오래된 숨결
교회가 말하는 시노달리타스는 한마디로 ‘함께 걷는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함께’는 단지 옆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친교 안에서, 참여를 통해, 사명을 향해 함께 걸어갑니다. 다시 말해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한 회의 방식이나 행정 개혁이 아니라, 교회의 삶과 활동 방식, 곧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따금 시노달리타스를 민주주의와 혼동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견을 모아 다수결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식별은 ‘여론’을 따라가는 일이 아닙니다.1) 때로는 다수의 의견이 주님의 뜻과 어긋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진리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의 동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찾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라는 교회의 특별한 선물이 등장합니다. 신앙 감각은 단순한 개인 취향이나 종교적 경외심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세례받은 하느님 백성에게 주시는 은사이며, 공동체가 복음의 진리에 반응하고 그것을 살아 내도록 이끄는 내적 감각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 감각이 신자들 안에서 자라고 표현될 때, 그것을 경청하고 교도권의 봉사 안에서 식별하며, 결국 모두가 함께 동의(consensus fidelium)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갑니다.
‘경청→식별→결정→수행’
시노달리타스는 이러한 순환 구조 위에서 살아납니다2). 초대 교회는 이미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방인도 할례와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해결하고자 예루살렘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공동체가 함께 이 갈등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겪은 선교의 체험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증언으로 나누며 무엇이 복음의 진리에 부합하는지 식별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교회 안에서 이어져서 교부 시대에도 함께 모여 논의하고, 합의한 내용을 서간으로 나누며, 교회의 일치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교회의 오래된 숨결입니다.
평신도, 상호적-순환적 경청의 길을 열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시노달리타스의 여정 안에서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참여’를 봉사나 도움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평신도는 이미 교회 복음 선포의 능동적 주체입니다. 이 주체로서의 참여는 세례의 은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세례로 우리는 하느님과 결합되고, 동시에 서로에게 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길을 찾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신앙인의 책임이며 권리입니다.
하지만 참여는 토의 중 발언의 양(量)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첫 번째 소양은 ‘경청’입니다. 경청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시노달리타스의 여정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것이 제일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이 교회 구성원 간의 경청입니다. 이는 교도권의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절차가 활성화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경청은 백성의 소리를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도권이 식별한 결과를 알려 준 뒤 백성의 소리를 다시 듣는 순환적인 경청의 길로 이어집니다.
둘째는 여론과 신앙 감각을 구별하는 ‘성숙함’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의견이 곧 진리인 양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감각은 개인의 욕구나 시대의 유행과 다른 결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보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열매는 대개 겸손, 일치, 자비,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교회의 성장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교도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구성원 간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교도권은 하느님 백성을 억누르는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 성령 안에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봉사하는 직무입니다. 평신도는 교도권을 불신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상호 간의 존중 안에서, 그러나 침묵이 아닌 책임 있는 참여로 교회의 길 찾기에 함께합니다.3)
질문을 바꾸면 공동체의 공기가 바뀝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시노달리타스는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령의 소리를 듣는 거룩한 습성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질문을 바꾸는 일입니다.
- “누가 정할 것인가?” →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시는가?”
- “어떤 의견을 관철할 것인가?” →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과연 어디인가?”
질문이 바뀌면 공기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매사 원만한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시노드적 구조’를 형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중심과 주변이 서로 이어지며, 경청과 식별이 지속적으로 순환하여 소통하는 흐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4) 교회는 이 길을 성령 안에서 걸어왔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 길을 살도록 다시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그 ‘함께 걷기’를 시작할 때입니다.
*끝.
각주
1) 교황청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감각』 118항.
2) 참조: 최현순, “진리의 충만함을 향해가는 교회(「계시헌장」 8항): 대화와 소통의 시노달리타스 여정을 위한 신학적 기초”, 가톨릭신학과상 87호(2022/겨울), 101-125쪽.
3) 참조: 박준양,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요소로서 신앙 감각과 그 식별: 국제신학위원회의 최근 문헌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신학과상 87호(2022/겨울), 69-78쪽.
4) Cf. Dario Vitali, Verso la sinodalità(시노달리타스를 향하여), Edizioni Qiqajon, 2014, pp.13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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