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아무리 말썽을 심하게 부리는 아이라도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면 철이 든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어릴 적에 동화, 예화에서 한번쯤 접했을 익숙한 장면이다. 사랑하는 이가 아픔을 겪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은 많지 않다.
철없는 아이도 부모가 아플 때 마음 아파할 줄 아는데, 부모가 아픈 자녀를 눈앞에 둘 때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 거듭난 왕실 관리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아버지로 거듭난 왕실 관리’다. 성경의 소제목과 조금 다르게 주제를 정한 것은 이 이야기에 나타난 그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 아버지로서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요한 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치유 이야기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신 이후, 4장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위독한 이를 치유하신 표징은 4장의 결론 부분에 와서야 나타난다. 여기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
카나-카나 사이클
우리는 요한 복음 2장 처음에 나타난 혼인 잔치 이야기의 배경인 카나로 돌아왔다. 많은 학자는 이 구조를 ‘카나-카나 사이클’이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a.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첫 번째 표징(요한 2,1-11) 요한 2,12: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이동하심 b. 예루살렘 성전 정화(요한 2,13-22) 요한 2,23-25: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 c. 니코데모와의 담화(요한 3,1-21)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증언(요한 3,22-30) 결론 담화(요한 3,31-36) 요한 4,1-3 : 예수님께서 유다 지방을 떠나심 d. 야곱의 우물에서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담화(요한 4,1-42) 요한 4,43-44: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들어가심 e.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요한 4,45-54) |
‘a.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첫 번째 표징’과 ‘e.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은 장소적 배경이 카나라는 점에서 일치한다(요한 2,1; 4,46). 또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표징이 첫 번째(2,11), 왕실 관리 아들의 치유가 두 번째 표징임이(4,54) 명확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온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는 점(2,4; 4,48), 기적 이후 더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는 점(2,11; 4,53)에서 서로 너무나 닮았다. 따라서 갈릴래아 카나 혼인 잔치의 첫 번째 표징과 오늘 살펴볼 카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을 처음과 끝으로 대칭을 이루는 한 사이클로 해석할 수 있다.
2장 첫 부분인 카나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여정은 예루살렘, 갈릴래아, 유다, 사마리아의 먼 길을 거쳐 다시 카나로 돌아오게 된 셈이다. 그렇기에 오늘 마주한 부분이 이 카나-카나 사이클의 결론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왕실 관리 아들의 치유 이야기에서 요한 복음 저자는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한 구절, 한 구절 찬찬히 살펴보며 우리가 묵상할 점을 찾아보자.
이야기의 배경
이틀 뒤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요한 4,43).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4,44).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4,45).
갈릴래아를 떠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향하신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만, 저자가 4,44에서 암시하듯, 그분을 예언자로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징들을 보고 맞이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다루어질 주제를 예상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전에 나타난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와는 명확히 대비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4,42)
어떤 표징을 체험해야만 그분을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단 신앙에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부적인 태도는 일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나에게 무엇을 해 주는지를 기준으로 상대방의 사랑을 판단하곤 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저 그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줘야만 진정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이러한 태도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는 쇼핑과 같을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이러한 미성숙한 사랑은 사랑이 지닌 그윽한 열매를 맺기는커녕 서로를 숨 막히게 만들어 머지않아 시들고 만다.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계시는가. 예수님은 당신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으셔야 한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천국 문을 열어 주신 것만으로도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 혹시 여기에 더해 나의 어떤 소망을 들어주셔야만, 내가 바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물을 더 주셔야만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왕실 관리를 만나신 카나 지역 사람들은 이전에 그분이 행하신 수많은 표징들(특히 자신들의 고향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을 기억하며 그분을 잔뜩 기대하면서 맞이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4,46).
갈릴래아 카나로 간 예수님께서는 병든 아들을 둔 왕실 관리를 만났다. 왕실 관리는 미리 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 사람이 처음 등장할 때 ‘왕실 관리’라고 표현되어 있음을 잘 기억해 두자.
왕실 관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기에서 ‘왕실 관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 바실리코스βασιλικός는 왕실에서 근무하는 관리를 의미한다. 그러니 본문에 나온 ‘왕실 관리’는 그 악명 높은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의 왕실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카나가 속해 있었던 갈릴래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이었고, 왕실 관리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카파르나움은 실제로 왕실 업무를 담당했던 이들의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궁궐은 카파르나움에서 멀지 않은 티베리아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 관리는 당시 사회에서 최상위 계층에 속했음을 생각해 보자. 재력과 인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재력은 자신을 마중 나온 종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4,51). 더불어 그는 분명 왕실에서 근무하는 엘리트 의사들은 물론, 전국의 소문난 의사들을 고용하고도 남을 충분한 정보와 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왜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가난하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일까?
아마 아들의 병은 그 명의들조차 손대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내로라하는 의사들조차 모르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요한 복음에서는 질병과 죽음이 대부분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를 치유하시고 이를 죽음과 연결하여 설명하셨으며(5,21), 라자로 역시 심각한 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11,2.14). 이 정도면 아들은 단순히 몸이 좋지 않아 누워 있다기보다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사회적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래서 한 줌의 마지막 희망을 쥐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실제로 왕실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4,47).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장소의 언급이다. 병든 아들이 지냈던 곳은 카파르나움이었다. 카파르나움에서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카나는 무려 27km나 떨어져 있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거리다. 게다가 카나는 산악 지역이라 마차도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을 살리고자 이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헤로데 왕실의 안락한 환경에서 종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삶을 보냈을 이 관리가 뙤약볕 아래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걸은 적이 있었을까? 루카복음을 보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누군가를 치유해 달라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보내기도 한다(루카 7,3). 그러나 그는 이 길을 직접 걸어왔다. 아버지의 절박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