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 살아져

WYD2027

살면, 살아져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202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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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질문들〉에 배우 염혜란 씨가 나온 영상을 우연히 보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많은 시청자에게 연기 정말 잘하는 배우로 사랑을 받는 염혜란 배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그녀는 1950년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해녀 광례를 연기했는데, 나는 그 연기에 참 많은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렸었다.

 

〈질문들〉에서 만난 염혜란 배우는 평범하지만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 한마디로 참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한 번 마음이 뭉클했다. 그리고 나는 염혜란 배우가 연기한 광례의 대사들이 다시금 떠올라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극 중 광례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산 사람은 또 잊고 살아져. 살면, 살아져. 죽어라 팔다리를 흔들면 검은 바다 다 지나고 반드시 하늘 보여. 반드시 숨통 트여.”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그간의 삶, 그럼에도 결코 스러지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선 한 여인의 역사가 살면, 살아진다.”는 말에 농축되어 있다.

 


 

서울에서 만날 그날을 위해

 

작년 8, WYD 조직위원회에 갑작스럽게 투입되어 미친 듯이 뛰어왔다. 쏟아지는 일들을 해내는 것만도 버거운데, 앞으로 해야 할 과업들을 계획하고 바티칸은 물론 정부와 다양한 관계자들과 소통해야 했으며,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업무를 분장하고 추진하는 일까지 더해졌다.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온 1년이었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했으면 어느 정도 큰 그림이 잡히고 조직이 짜임새 있게 돌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또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그 앞에서 때로는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과연 이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마저 엄습한다.

 

지난 8, 레오 14세 교황님은 전 세계 청년들에게 2027년에 세계청년대회의 공식 개최 일자를 발표하시며 다음에는 서울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정부와 지자체, 언론 기관 그리고 다양한 민간 업체에서 연락이 쏟아지고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회의와 미팅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행여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또 살피지만, 처리하지 못하고 밀린 일들로 늦은 밤까지 책상에 붙어 있다가 지친 몸을 침대에 내동댕이치며 하루를 마감한다.

 


 

WYD를 위한 멈추지 않는 발걸음

 

물론 이 엄청난 복음화 사업을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는 매일이다. 하지만, 두렵다. 사제로서, 아니 한 사람으로서 두렵다. 행여 부족한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지, 이 과정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을 챙기지 못해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지. 매일 아침 미사 때 눈물 없는 흐느낌과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주님께 용기를 달라고 청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고 용기를 내거라. 내가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 때 더 두렵다. 이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하느님께서는 다른 표징을 통해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려 한다. 우연히 만난 염혜란 배우, 그리고 다시금 떠올린 광례의 유언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죽어라 팔다리를 흔들면 검은 바다 다 지나고 반드시 하늘 보여.”

 

매일매일 쉬지 않고 발로 뛰며 사람들을 만나고, 보편 교회와 청년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면 어느샌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교황님의 밝은 미소에 기뻐하는 청년들의 환호와, 성체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는 청년들의 눈물 섞인 기도의 모습을. 그것이 광례가 말한 하늘, 하느님께서 내게 마련해 주실 하늘이 아닐까?

 

살면 살아진다는 유언은 자신의 삶을 요령을 피우며 대충 살아간 여인의 고백이 아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싸운,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간 한 여인의 위대한 고백이다. 나도 이 대회가 끝나고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주님, 정말 살면 살아지더라고요. 두려움에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당신, 달릴 힘을 북돋아 주시는 당신 덕분에 정말 살면 살아지더라고요.’

 

이 고백을 드리는 그날까지 부족하고 죄 많은 저를 지켜 주시는 당신과, 당신께서 보내 주신 수많은 이들을 믿고 달리고 또 달리리라. 그리하여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고백하리라.

 

사진 ⓒ 이영제

WYD 센터 봉사자들과 함께 봉헌한 열린 미사 후에(2025.8.29.)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프랑스에서 교리 교육 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WYD 법인 사무국 및 기획 사무국 국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을 통해 하느님과 기쁘게 만나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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