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워지는 신비, 가난은 영혼의 자유다

성경 이야기

비워야 채워지는 신비, 가난은 영혼의 자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2026.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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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은 부활을 향해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시간입니다.

그 여정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붙들 것과 내려놓을 것을 분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묻다 보면, 결국 마음의 가난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신 이들은

비움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비움과 절제

 

성경은 언제나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라고 가르칩니다(필리 2,6-11 참조). 그 이유는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그 빈자리를 하느님 것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비움은 절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절제를 하느님의 영이 가져다주는 열매라고 말합니다(갈라 5,23 참조). , 자신을 비우는 이는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선포하신 참행복 선언의 첫 번째 말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가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프토코스페네스

 

그리스어에서 가난하다를 뜻하는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먼저, ‘페네스(πένης)’라는 단어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 정도의 가난함이나 궁핍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달리 프토코스(πτωχός)’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섯 번에 걸쳐 프토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마태 5,3; 11,5; 19,21; 26,9; 26,11 참조), 이는 물질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억압받는 모든 불행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자신을 방어할 힘을 갖지 못하고 강자 앞에서 저항할 수도 없는 사람, 생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하며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든 이가 프토코스입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이란?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음이 프토코스한 사람이라는 표현 또한 사용합니다. 우리말로는 의역이 되어 있는데, 이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자면 영이라는 측면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영이라는 관점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영이라는 측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까요? 바로 영적으로 모든 것을 비운 사람, 하느님의 영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이끄심을 갈망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는 영이 가난한 사람은 결국 내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만이 진정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마음의 가난과 내적 포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가난은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가난하면서도 검소한 생활양식, 곧 절제를 실현하며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가난 자체가 곧 영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재물을 모두 버린다고 해서 곧바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가지지 못한 것에 정신을 쏟고, 그것을 채우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 가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가난은 환상과 공허를 낳을 뿐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사가는 참행복 선언에서 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선언합니다(루카 6,20 참조). 예수님께서 칭송하신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있든 없든, 그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며, 내적인 가난, 곧 마음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께 모든 자리를 내어 드리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이들의 영혼 속에 흘러 들어가 그곳을 가득 채우십니다.

 


 

지금, 행복한 이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입니다. 이 단어는 인간적인 행복을 넘어서는 신적인 행복을 의미합니다. 비록 지금 처한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선언입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 행복이 미래형이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선포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 행복했다거나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하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가 장차 주어질 것이라기보다 바로 지금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의지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무슨 뜻일까?

 

하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곳,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해 보편적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하니까 어떤 장소를 지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일종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마태 11,12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거부당하신 현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신 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분, 하늘 나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아직속에 살아가는 이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비로소 그 충만함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종종 불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들이 마카리오이하다고 알려 주십니다. 비록 지금은 슬퍼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더라도(마태 5,4-11)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와 충만함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며 그분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지니고 있기에 그들은 바로 지금 행복합니다. 이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입니다. 하느님 안에 속해 있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런 행복을 맛본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 그분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영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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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부산교구 사제.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를,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부총장으로 일하며 성서와 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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