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이해인 수녀의 영혼의 일기, 《해인의 바다》를 만나다

가톨릭 예술

[미리보기] 이해인 수녀의 영혼의 일기, 《해인의 바다》를 만나다

《민들레의 영토》 출간 직후, 1976년 수도 생활의 기록

2026.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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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공개하는 수도 생활의 기록, 《해인의 바다》

 

《해인의 바다》는 이해인 수녀가 1976년 《민들레의 영토》를 발표하던 무렵의 기록을 담은 산문집입니다. 종신 서원 전후의 젊은 수도자가 신앙 앞에서 흔들리고, 질문하고, 다시 다짐하던 사계절의 시간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시간을 따라, 이 책장을 함께 넘겨 볼까요?📖

 


 

조용한 주일 | 어느새, 봄 속으로

 

주님.

봄은 진정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생명, 부활, 기쁨, 희망, 환희, 출발, 사랑처럼 많은 단어가 우리의 가슴 안에서 춤추는 계절. 목련, 모란, 난초, 라일락 같은 온갖 꽃들이 제 나름대로 성장하며 서 있는 뜰에서 저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또 작은 오랑캐꽃이나 민들레가 배시시 웃으며 피어난 봄길 모퉁이에서 저는 당신을 더욱 기억하고 사랑합니다. 커다란 히말라야시다가 높이 뻗어 나가는 그 밑에 앉은뱅이 노란 민들레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어요. 다 자란 모양이 그러할 뿐인데, 사람들은 앉은뱅이라며 쳐다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피어나고 있어요. 연약한 힘이지만 흔들림 없이 활짝 피어났다가 솜털처럼 하얀 씨를 바람에 날려 사랑을 보내서 생명을 갖게 합니다.

 

사랑하온 저의 주님, 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당신 외엔 가진 것이 없는 아주 작은 민들레가 되게 해 주십시오. 피었다가, 피었다가 드디어는 하얗게 머리를 풀고 당신의 오심을 고대하는 행복한 민들레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그 작은 민들레는 모든 꽃들과 함께 영원을 노래할 것입니다.

 

1976. 4. 24.

(1어느새, 봄 속으로중에서)

 

ⓒ 이해인 수녀 제공

 

 

 


 

파도 소리 | 풍덩, 여름의 한가운데로

 

마음에 푸른 파도 소리가 높이 들립니다. 언젠가 광안리 바다에서 떠다 조그마한 그릇에 담아 놓은 하얀 모래, 그리고 작은 조개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말에 약간 상처를 입은 오늘 오후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하나의 공부로 받아들여야겠지요. 거기에서도 제가 취해야 할 태도를 꼭 찾아야 하겠습니다.

 

고독의 의미를 더 잘 깨우치게 해 주시기 위해서, 또 배고프고 겸허한 자의 자기 인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신께서는 가끔 타인의 말을 통해 저를 훈련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 역시 잘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고, 도움이 되는 것이니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주님. 제가 다른 이들의 그 어떠한 칭찬에도 들뜬 허영심을 갖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또 그 어떠한 비난에도 지나치게 상심해서 제 할 바를 못하는 나약한 자가 아니 되도록 늘 깨우쳐 주십시오. 사람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걸 수도 없거니와, 완전한 실망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영원한 것, 그리고 그것은 당신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1976. 7. 29.

(2풍덩, 여름의 한가운데로중에서)

 

 


 

가을비 | 훌훌, 가을을 건너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스산하게 뿌리는 가을비.

주님.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대로 제 것으로 아뢰고 싶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20)

 

얼마나 아름답고 용기 있는 고백입니까.

 

오늘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면서, 흙에서 피어난 작은 잎사귀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짐짓 새로워지는 경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씨앗을 뿌릴 때는 흙 속에 보이지도 않게 묻었는데 하나둘씩 잎이 돋고 무성해 간다는 사실.

 

, 주님.

우리의 영혼을 키워 주시는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찬미받으소서.

 

1976. 10. 30.

(3훌훌, 가을을 건너며중에서)

 

 


 

아침노을 | 그래도, 겨울을 견디며

 

회색빛 하늘 위로

물바다를 이루던 아침노을.

그리고 잠시 후 불덩이처럼 둥글게 그 엄위로운 모습으로 제게 빛살을 보내던 태양.

, 하느님.

그리하여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많은 배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고,

우리들은 각자 일터로 나가 또다시 낯익은 이와 낯선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 이해인 수녀 제공

 

새로 맞는 아침마다 삶의 기적을 배웁니다.

기적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 하루하루가 벌써 놀라운 기적이며,

잊지 못할 경이로움인 것을.

그러니,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1976. 12. 7.

(4그래도, 겨울을 견디며중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신간 에세이 《해인의 바다》

*《민들레의 영토》 출간 50년 만에 공개하는

수도 생활의 내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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