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지난 편을 안 보셨다면, 먼저 읽어 보시길 추천해요.
안녕하세요, 한민택 신부입니다.
먼저 시작 기도로 에페 2,8-10 말씀을 듣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자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핵심인 ‘무상의 선물’, 곧 은총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임을 함께 되새기고자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영성가와 신학자들의 사상은 한결같이 무상의 선물인 은총으로 수렴합니다. 은총이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신앙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은총을 통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은총의 본질적인 특성은 ‘무상성’에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신 의지에서 비롯되어 인간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에페 1,7-8)
우리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권리와 자격, 의무와 같은 법률적 용어에 매여 있는 건 아닐까요? 성직과 수도 생활 역시 이러한 틀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부르심의 매력’은 하느님과 맺는 무상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기쁨에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다시 나타난 별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에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뻐했던 것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기쁨은 하느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권리와 자격이라는 법률적 관계, 의무의 관념에서 벗어나 무상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무거운 숙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펼치시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이며 기쁨 충만한 삶으로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흘러넘치는 은총
은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떤 체험을 가리킬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오늘을 위한 신앙 고백》(국내 미번역)에서 영감을 얻고자 합니다. 교황님은 이 책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사랑’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동안 지구가 중심이라고 여기던 세계관이 태양을 중심으로 전환되었듯이, 사랑은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오던 인간이 그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삶의 모든 것이 그분을 중심으로 돌게 만드는 전환을 이룹니다.
어쩌면 이러한 삶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늘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은 신앙인은 그 사랑에 힘입어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그 ‘흘러넘침’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입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은총을 받기에 얼마나 부당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그 은총을 요구할 수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상의 은총을 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체험은 바로 용서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는 경험은 많은 빚을 탕감받는 경험과도 같습니다.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용서를 통해 은총을 체험한다는 것은, 채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죄스러운 삶이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사로 탕감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고 타인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를 인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매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은총을 체험하는 방식과 시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에게 준비된 ‘때’가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마음이 움직일 것처럼 보이지 않던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뜻을 굽히며, 오만함과 교만을 내려놓고 자기 앞의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때를 맞이합니다. 우리 삶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은총은 때가 되었을 때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술을 하루 앞두고 기도를 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왔지만,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자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하느님과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 왔는지, 그 사랑에 얼마나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은총을 선물로 주시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거두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마치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야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상의 관계
흘러넘치는 은총을 깨닫는 일은 이전까지 스스로 만들어 놓았던 세계가 깨지는 과정을 동반합니다. 오만과 고집으로 쌓아 올린 세계, 거래의 논리에 따라 손해 보지 않으려 애쓰던 마음의 구조가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변화 없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여전히 권리나 거래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법률적 관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무상의 관계, 서로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는 관계는 긴 시간을 거쳐 형성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처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이는 자격과 권리라는 법적 차원에서의 접근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고초를 겪고 집으로 돌아온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자격을 내려놓을 때, 유산의 상속이라는 법적 관념을 깨뜨릴 때 순수한 인격적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자비와 용서를 통해 새로운 탄생과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32)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작은아들이 돼지를 치며 떠올린 사랑의 기억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받았던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루카 15,17)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무상’의 관계, 순수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셈으로 따지지도 않는, 기꺼이 선물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관계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느님께 ‘빚진 사람’처럼 다가가지 않나요? 그러나 이 관계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돌아온 것만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아들’처럼 그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상처 입은 영혼을 인정하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는 복음서는 실은 예수님의 일대기가 아닌, 초대 교회 신자들이 경험한 은총의 세계, 무상의 선물로 주어진 삶을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 새로 발견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나라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 마술과 같은 환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전부 바치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 나라는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은총의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치유, 구마는 어떤 의미일까요? 마태오는 악령을 쫓아내고 앓는 사람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떠올립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7) 즉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구마나 치유가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병고와 질병을 대신 떠맡고 짊어진 채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모든 행적을 이해하는 열쇠는 가엾은 마음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자애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자애란 가련하고 불쌍한 이를 보고 그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이 가엾은 마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느끼신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이 치유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겉으로는 나약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자비가 궁극적으로는 죄악을 이기고,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죄와 악, 병과 고통, 죽음과 절망,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자유와 평화, 환희와 기쁨, 온유와 겸손, 용서와 자비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일방적인 은총이 아닌, 인간의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용기와 격려를 통한 신뢰의 회복이고 사랑의 경험이며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마음이 그들의 존재를 일깨우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베푸신 은총에 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나라, 그 다스리심으로 우리를 다시금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큰 은총으로 우리 각자를 찾아오시고, 당신 자녀로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은 의무감으로서가 아닌, 그분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의 응답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의 논리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기 전부터 넘치고 넘치는 은총의 선물을 끊임없이 베풀어 주셨음을,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베풀어 주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이 그 은총에 대한 깨달음이자 응답일 때 그 삶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당신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으신 관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고 내어 주는 관계로 말입니다. 관건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여는 것이며, 아버지를 뵙고 그분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 마음과 존재 깊은 곳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요한 1서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 3,1)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 루카 15,11-32
· 마태 20,1-16
위 성경 구절을 읽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 성직, 수도 생활, 부르심에 대해 응답하는 삶이 은총으로 빚어졌음을 묵상해 봅시다. 우리 삶 안에서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총의 순간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다시 감사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조건을 달지 않고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아티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