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만난 이들: 요한 복음 속 이야기>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내 이름은 엘리오르. 하느님은 나의 빛이라는 뜻이다. 참 예쁜 이름이지만 슬프게도 나는 내 이름의 뜻을 알지 못한다. 빛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온 첫날 이후 스물여덟 해가 지난 오늘까지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또래 아이들이 빨강, 파랑, 노랑을 외치며 색칠 공부를 할 때 나는 친구들과 무엇을 할지 몰라서 그저 선생님 곁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아서 그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를 듣고 흙먼지 냄새를 맡으며 구석 돌판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그저 앉아 있는 것은 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우리 율법은 나와 같은 소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말이다(레위 19,14; 신명 27,18). 가진 것 하나 없는 나에게는 적어도 핍박을 면케 하는 큰 뒷배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나에게 자선을 베푼다. 그리하여 부모님께 짐이 되기 싫었던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그분들께 성전에서 지내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나는 성전에 기도하러 찾아온 이들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께 호소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 소경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 특히 청각과 후각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발달해 있다. 나는 성전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그의 기분 상태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랍비 힐렐이 오는구만. 오늘은 저이가 성경을 봉독할 차례인가 보군.’
‘요하난이구만. 오늘은 아내와 다투고 나왔나? 숨소리가 왜 저래?’
‘오늘은 니코데모가 성경을 봉독하는군. 그런데 목소리가 왜 저렇게 힘이 없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성전 주랑에 오랜 기간 앉아 있다 보면 성경 봉독 소리를 듣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 십 년이 지났을 때에는 나는 성경을 봉독하는 소리에 앞서 다음 구절을 먼저 외울 정도가 되었다. 내 머릿속의 성경 지식은 점점 쌓여 갔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공허해졌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듣고 외워도 소경은 여전히 소경이었다. 사람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나를 죄인 취급했다.
어느 날에는 율법을 공부하는 두 학생의 토론을 엿듣다가 이런 말도 들었다.
“친구여, 저번 수업 시간에 랍비께서 읽어 주신 구절이 어디인지 도저히 모르겠네. 모세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내리신 불을 꺼 주시는 구절 말이야. 어디였지?”
“그러게 말이야. 나도 가물가물한데, 큰일이구만. 내일까지 그 구절로 토론을 해야 하는데…….”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민수기 두루마리를 펴고 열 바퀴 정도 말아서 보이는 부분을 찾아보세요. 아마 광야에서 백성이 이집트 음식을 그리워하는 구절 전에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는커녕 도리어 나에게 역정을 내었다.
“어디서 죄인이 우리를 가르치려 들어!”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바닥의 죄인. 이곳에 앉아 있던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성경 치유 이야기를 들었다. 미르얌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7일 만에 악성 피부병에서 회복되었고(민수 12,10-15), 아람 사람 나아만 역시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 나병의 치유를 얻었다(2열왕 5).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처럼 죽은 이를 살려 낸 적도 있었다(1열왕 17,17-24; 2열왕 4,18-37).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눈먼 이를 보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눈먼 이를 눈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이사 35,5; 시편 146,8). 그분은 언제쯤 내 눈을 뜨게 해 주실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처음 들은 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던 날이었다(요한 2,13-22).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에서 이익을 취하던 바리사이들은 그분에게 반감을 갖고 바로 항의하였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구약의 어느 구절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였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호세 6,1-2)
소스라치게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분께서 내게 이 불행을 주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분께서 나와 함께 살아나신다니…… 이게 무슨 말씀일까.
그로부터 1년이 지났을까. 일상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멀리서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분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사람들 사이에 바로 그분이 계심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분의 제자로 보이는 이가 그분께 무엇인가를 여쭈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숨이 멎는 듯했다. 내가 평생을 고뇌했지만 도무지 답을 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분은 과연 어떻게 말씀하실까?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윽고 진흙을 만들어 내 눈에 바르셨다. 하지만 사실 흙을 적시실 필요는 없었다. 눈물이 이미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었다.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그분의 말씀을 듣자마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해 지는 쪽 언덕 아래로 가면 히즈키야가 기혼 샘의 물을 끌어다 만든 그 못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역대 32,30).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앞을 보게 된 나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아픔을 느꼈다. 눈을 뜬 뒤에도 무엇이 내가 알던 것인지 알아보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으로 본 나의 부모님, 처음으로 본 나의 이웃들, 그리고 나를 죄인 취급했던 바리사이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표정과 나를 경멸했던 이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나는 그 표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침묵할 수 없었다. 나를 죄인 취급하고 나에게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아는 것은 안다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께서는 예언자, 아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아니 주님이심이 틀림없었다. 성경에 따르면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도 마음을 고쳐먹기는커녕 내가 평생 삶을 의존하던 그곳 밖으로 나를 쫓아내 버렸다.
그런 내 앞에 어느새 그분이 다가와 서 계셨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은 내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나는 한동안 넋이 나간 채 그분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혼란이 밀려와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곳에서 말씀이 다가오시기 시작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에 엎드렸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그분을 보았다. 나의 빛을, 그분의 빛을, 그분의 영광을 뵈온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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