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함께 준비하는 고해성사

영성과 신심

글쓰기와 함께 준비하는 고해성사

마음속에 촘촘한 ‘체망’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2026.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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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은 부활을 향해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시간입니다.

그 여정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붙들 것과 내려놓을 것을 분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을수록 시간은 흐릿하게 흘러갑니다.

그때 글로 일상을 적기 시작하면 우리가 보낸 시간이 선명해지고

기록은 양심을 깨우기 시작해요.

고해성사를 준비하며, 글쓰기를 시작해 볼까요? 🖋



 

글을 쓰려고 글쓰기 수업에 왔더라도 막상 글을 쓰자고 하면 수강생들은 대부분 난감해한다. 그 이유를 들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쓸 말이 너무 많아서고 두 번째는 쓸 게 없어서다. 괴로운 건 확실히 후자 쪽이다. 시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감이 없는 괴로움을 나도 잘 안다. 원고를 청탁받고 한참을 생각해도 무엇을 쓸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글감이 없다는 건 내 마음속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거름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동안 쓰는 일에 게을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감의 탄생

 

글을 자주 쓰면 고유의 문체뿐 아니라,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글감을 건져 올리는 가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체는 금세 성글어지기 때문에, 일상에서 겪은 세세한 경험들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쑤욱 빠져나가 버릴 수 있다. 그렇게 일상은 마음속에서 금세 흐려지고, ‘이걸 까먹겠어?’라고 생각했던 중요한 일들도 쉽게 잊힌다.

 

물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체망도 다시 촘촘해진다. 예전에는 휙 통과하고 말았을 사건이 마음 어딘가에 걸려 남아 있게 된다. 그렇게 비로소 글감이 탄생하게 된다. 즉 똑같은 일상을 지내면서도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쓸거리가 휘발되지만, 꾸준히 글쓰기를 하면 쓸거리가 차곡차곡 쌓인다. 그래서 글감이 없다고 느껴지면 나는 일단 반성부터 한다. 그동안 쓰기에 소홀했다는 것이니까.

 


 

고해성사를 하려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늘 어려운 게 있다. 고해성사다. 성탄과 부활이 다가오면 나는 판공성사 드릴 걱정부터 하곤 한다. 고해성사를 한 뒤 은총이 충만한 상태를 몇 번이나 경험했던 만큼 성사를 드리는 일이 싫지는 않지만, 고해소에 들어가 무엇을 고백할지 생각하면 막막해지기가 일쑤다. 나의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헤아리다 보면 짙은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고해성사에서도 마음속 체망은 중요하다.

 

가장 최근에 언제 고해성사를 드렸는지 생각하고, 그날부터 오늘까지 일어났던 일 가운데 죄가 될 만한 사건이 있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걸려드는 기억이 없다. 일주일 혹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뭉툭한 덩어리로 한데 떠올랐다가 흘러가 버리고 만다. 우리 안에 있는 체의 구멍이 아주 커다랗게 변해 버렸거나, 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해성사를 멀리하면 마음의 체가 성글어지고, 결국 영혼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놓치게 된다. 만약 고해성사를 자주 드리며 영혼을 좀 더 촘촘하게 들여다보았다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우리의 영혼이 삐거덕거린 지점이나 어딘가 석연치 않았던 느낌을 더 세세히 기억했을 것이다. 마음속 거름망에 쌓인 것이 늘어나 고백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글쓰기, 고백의 시작

 

고해성사를 가능한 자주 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글부터 써 보자. 글쓰기는 마음의 체를 촘촘하게 만들어 일상을 세심히 살피게 해 준다. 우리 본당 어린이부 주일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 친구들이 집중 판공을 할 때 연필과 종이를 나눠 준다.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 양심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성전에서 읽어 주면서 각자 성찰한 내용을 적어 보게 한다. 평소 교리 수업 교재나 활동지에 무언가 적어 두라고 일러 줄 때마다 질색팔색하는 어린이들도 이때만큼은 열심히 끼적인다. 잠시 후 고해소에 들어가 당황하지 않으려면 지금 뭐라도 적어 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아이들도 아는 것이다.

 

끼적인 종이를 소중히 들고 고해소 앞에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 고해성사를 드린 아이들이 세상 개운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다. 그 빛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게 바로 성사의 은총이구나 깨닫는다.

 

이제 또 한 번 그런 은총을 누릴 때가 되었다. 올해 사순 시기는 평소보다 이르게 시작하기에 지난 성탄 판공성사 이후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 성사 때 사용했던 우리 마음속의 체망이 아직 성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일상을 고운 체에 쳐서 무언가를 걸러 내고 붙잡아 둘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체가 제 역할을 하는지 걱정된다면, 다가올 고해성사를 준비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일기를 써 보자.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가장 쉬운 건 역시 뒷담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향해, 차마 얼굴에 대고 하지 못한 험한 말들을 글로 옮긴다. 그가 저지른 악행을 낱낱이 써 본다. 자신이 마치 판사라도 된 양 형벌을 선고해도 좋다.

 

충분히 쓴 뒤 더 이상 욕할 게 없으면 이제 스스로가 겪는 고통에 대해 써 보자. 몸과 마음에 드러난 고통을, 자신이 얼마나 처참히 무너졌는지를,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쓴다. 하느님께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심정으로.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지만, 나는 글을 쓸 때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생각으로 쓴다. 귀찮아도 자세히 묘사하고 과장을 섞어 가며 엄살을 부리고 생색을 낸다. 행복은 그저 만끽하면 되지만, 어떤 불행은 뜯어보고 해체하고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 곱씹을수록 괴로워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톺아보면 신기하게도 고통과 불행의 크기가 줄어든다. 억울하고 한시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된다.

 


 

남김없이 고백하고 용서받을 것

 

여기까지 썼으면 이제 고해소에서 말할 대본을 적어 볼 차례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과 스스로의 고통을 제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자꾸만 넘어지게 하는 일상의 어느 지점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게 하는 일에 대해 적다 보면 알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윤곽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발생한 일을 그제야 발견한다.

 

알고 난 다음에는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고해소에서 고백하려는 대부분의 일은 사실 우리의 삶을 조금도 망가뜨리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다. 수많은 사람이 보내는 비난의 화살을 받거나 크나큰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다.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이전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그 일을 인지한 이상, 전과 같이 살 수는 없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아무런 의혹 없이 용서받아야 한다.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는 존재.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멀어지는 인간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몸소 부르신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물론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것은 아니다. 진작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던 고백을 이끄는 질문이다. 그 고백이 없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시기에, 우리의 진솔한 고백을 듣길 원하신다. 당신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원하시는 것이다.

 

글쓰기와 고백은 삶이 고통스러운 동시에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알려 준다. 조금만, 용기를 내면 된다. 시간이 없다고 미루다가 끝내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서야 글을 끄적이고 고해소 앞에 서기를 반복하는 건, 결국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내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부터 써야겠다. 하느님께 보내는 청구서 형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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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cpbc 라디오 작가. 라디오 작가가 된 이후 10년 넘게 매일 글을 써 왔습니다. 글쓰기는 때로는 숨 막히게도 하고, 때로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기도 했습니다.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순간들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글을 쓰건 쓰지 않건 은총은 주어지겠지만, 내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보다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여전히 글쓰기는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제 글을 통해 글쓰기에 매혹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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