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비추는 교회의 지혜>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교회 안에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목소리’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 역사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밝히는 교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교의를 살아 내기 위해서 필요한 교도권의 역할도 간략히 짚어 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역사 속에서 교회 공동체의 시선을 복음에 더욱 가까이 이끌었던 교도권 문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산업화가 가져온 ‘새로운 사태’
가장 먼저 살펴볼 문헌은 레오 13세 교황님의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1891)입니다. ‘노동자들의 상황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회칙은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노동자들의 비참함에 대한 사회주의 이론을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산업 혁명 이후의 사회상은 중세적 경제 질서가 지배적이었던 사회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중세적 경제 질서에서는 공장 노동자와 같은 자립적인 임금 노동자가 없었기에, 산업 사회에서 야기된 사회 문제도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산업 사회의 노동자 문제라는 이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문제 발생의 원인을 인식하고 어떤 방향에서 사회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고심했습니다.
교회는 노동자와 그들 가정의 비참함에 직면하여 노동, 노동 분업, 임금, 자본과 이득, 생산과 생산성, 시장과 경제, 공급과 수요, 경제 활동의 호경기와 불경기 등의 문제뿐 아니라 소수의 사람만이 부를 축적하는 원인에 관해서도 연구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은 교회가 당시 지배적이던 자유주의와 그 적수인 사회주의의 견해를 인식하고, 그들의 이론이 그리스도교적 사회 원리와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견해를 표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노동자를 향한 교회의 관심
《새로운 사태》의 근본적인 관심 대상은 ‘노동자’입니다. 이 회칙은 서두에서 사회경제적 갈등의 원인으로 새로운 산업의 출현, 새로운 기술의 발전, 노사 관계의 변화, 극소수 부자와 대다수 빈민, 노동자들의 자의식과 연대 의식의 형성, 윤리의식 저하 등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열악한 노동, 특히 여성과 미성년자의 노동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지적합니다.
이 회칙은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양극단을 피하는 균형 잡힌 사회 원리를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소외된 빈곤층, 특히 노동자 계급을 향한 큰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당시 사회는 암울했습니다.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원리를 경제 활동의 철칙으로 주장하며, 경제에 관한 국가의 개입이나 입법, 노동조합의 설립과 활동을 걸림돌로 간주하였습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재산의 전면 공유화와 국가의 권력 독점을 주장하였고,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대신 국가에 종속시키려 하였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 레오 13세 교황님은 국가 기능의 지나친 확대와 권력 독점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인간의 자연권(사유 재산권)에도 어긋난다며 비판하셨습니다. 즉, 국가가 사유 재산권을 철폐할 권리가 없고 일반적 공공복지와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만 규제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사유 재산 제도는 유지하면서 심각한 빈부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와 더 가까이 계셨지만, 무작정 자본주의의 편을 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국가가 경제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개입하거나 법률을 제정해야 하며 노동조합을 육성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보셨습니다. 또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동자 당사자들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도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회의 으뜸 과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똑같은 존엄성을 지니며, 모두 교회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 분규를 완화하고 종식시키는 데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경제에 보조적으로 개입해야 하지만, 공권력을 통해 가난한 노동자의 복리를 증진하고 최선의 대책을 강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교황님은 사회 개혁을 주장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만연했던 ‘계급 간 적대감은 자연적’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노동 없는 자본이 없는 만큼, 자본 없는 노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계급은 국가 안에서 조화롭게 일치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은 단순한 우정만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결합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이를 가리키며 제도 개선 외에 ‘마음의 개혁’을 요구하십니다.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을 두 계급이 살아 내기만 한다면, 즉 다른 사람(이웃)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세속적인 고민과 이기심은 치유되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황님은 국가가 모든 시민,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인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포괄적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 주일과 축일의 휴무에 관한 배려
✔ 재산 보호와 프롤레타리아를 없애는 일
✔ 정당한 보수의 보장
✔ 인간 존엄성에 맞는 노동 조건의 정착
✔ 노동 착취 중지
우리에게는 상식적인 내용들이지만, 회칙이 반포된 것이 19세기 말이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존엄성을 보호하는 교황님의 제안과 대안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회 교리를 향한 한 발자국
《새로운 사태》를 통해 레오 13세 교황님은 신앙이 제공하는 도덕적 구속력으로부터 개인을 이완시키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일괄적인 사회 복리만을 강조하여 개인의 자유를 경시하는 사회주의 모두를 단죄하셨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국가들이 시장 경제 원리를 도입하거나 자본주의를 추구하던 국가들이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강화하거나 노동조합을 합법화하는 등의 변화를 겪어 온 것을 떠올려 보면, 반포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회칙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임 교황 비오 11세는 《새로운 사태》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사회 활동의 안전한 기초가 되는 대헌장이라고 말씀하셨고, 요한 23세 교황님은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의 대헌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회칙 반포 40주년을 기념해 비오 11세 교황님께서 반포하신 회칙 《사십주년》 또한 가톨릭 사회 회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기에, 레오 13세 교황님이 교회에 남긴 유산은 매우 값집니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레오 13세 교황님의 안목 덕분에, 교회는 가톨릭 사회 교리를 정리하고 세상과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 공동선의 원리
✔ 연대성의 원리
✔ 보조성의 원리
✔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
《새로운 사태》 안에는 이와 같은 사회 교리의 네 가지 원리의 뿌리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4월에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레오 13세 교황님께로부터 이어지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 참여의 전통을 전 세계 신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레오 13세 교황님께서는 선종하셨지만, 그분께서 남긴 유산은 앞으로도 가톨릭 교회 안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새로 선출되신 레오 14세 교황님께서 레오 13세 교황님을 염두에 두고 교황명을 선택했다고 직접 밝히신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다음 화에서는 교회가 세상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한 역사적 사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그 문헌들을 통해 《새로운 사태》가 열어 준 새로운 지평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