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믿음의 기록: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

📚서평

실패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믿음의 기록: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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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3. 26
읽음 4

그리스도의 탄생

엔도 슈사쿠 저자() · 이평춘 번역

가톨릭출판사 · 20220414

실패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믿음의 기록: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

 엔도 슈사쿠는 흔히 침묵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신앙적 탐구의 정점은 오히려 이 책,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성서 속 신비에 가려진 부활의 사건을 매끄러운 신학적 논리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이고 처절한 제자들의 심리 추적기로 풀어냅니다.

 

일반적인 종교 서적들이 그리스도의 전능함에 집중할 때, 엔도는 철저히 제자들의 비겁함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스승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목숨을 건 전도자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작가는 이 극적인 변화의 원동력을 죄책감용서라는 키워드로 분석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저버린 예수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 뜨거운 체험이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이 책은 전작인 예수의 생애와 궤를 같이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행한 기적보다, 그가 떠난 뒤 남겨진 이들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엔도 특유의 유려한 문체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교회사적 배경을 한 편의 심리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재현해 냅니다.

 

종교 유무를 떠나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울림은 강력합니다. 실패와 후회로 점철된 과거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그리고 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역사적 예수의 흔적을 쫓으면서도, 결국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앙의 원형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복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비겁했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초상을 발견하고, 그들의 변화를 통해 우리 삶의 회복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희망의 인문학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신앙이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눈물겨운 고백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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