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활자의 이동’, 책이라는 은밀한 성찬

📚서평

목숨을 건 ‘활자의 이동’, 책이라는 은밀한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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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9. 09
읽음 4

조선 천주교 출판사
프랑스 선교사 훈민정음 인쇄 출판 이야기
저자: 가톨릭출판사 역사 연구회
출판: 가톨릭출판사
발행: 2026.08.28.
가톨릭출판사 책 제공 

목숨을 건 ‘활자의 이동’, 책이라는 은밀한 성찬

우리는 흔히 신앙을 마음속으로 믿고 기도하는 추상적인 행위로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가톨릭출판사 역사 연구회의 ‘조선 천주교 출판사’를 골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앙이란 어쩌면 목숨을 건 ‘활자의 이동’이자 ‘기록의 밀항’이 아니었을까 하는 서늘한 울림이 밀려옵니다. 

이 책은 하나의 출판사가 걸어온 연대기를 나열한 지루한 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슬 퍼런 박해의 칼날 아래서도 작은 책자 한 권, 성물 한 조각에 온 영혼을 싣고 멀고 먼 진리의 길을 열어젖혔던 선조들과 선교사들의 숨 가쁜 발자취를 담은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17세기 한문서학서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지적 충격을 주던 시기부터, 신앙의 자유가 없던 어둠 속에서 목판을 새기고 인쇄를 시도하던 처절한 장면들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조선의 신자들과 파란 눈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낯선 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도구 삼아 소통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들에게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얼어붙은 조선의 민중들에게 구원의 온기를 불어넣는 가장 따스한 불씨이자 성체(聖體)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리델 주교가 엮어낸 ‘한불자전’이나 ‘한어문전’ 같은 결실 뒤에는, 이방인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피를 말리며 펜을 쥐었던 선교사들의 뜨거운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먹먹해진 것은,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너무나 쉽게,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진리를 접하고 있는 풍요가 얼마나 거룩한 피땀 위에 세워진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책을 들여오고, 횃불 아래 숨어 몰래 성경을 베껴 쓰던 그들의 손길은 차가운 역사책 속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나태한 영혼을 가만히 흔드는 죽비처럼 다가옵니다.

‘조선 천주교 출판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책 한 권, 말씀 한 마디는 과연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투박한 종이 결을 어루만지며, 어둠 속에서도 기꺼이 빛의 거룻배가 되어 주었던 선조들의 간절한 눈빛을 깊이 품어보게 되는 소중한 독서였습니다.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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