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 지났다.
여전히 수습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을 하지만 그 명칭이 없어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신입이라는 말 아래에서 아직까지 정돈되어가지 않는 일상을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말동안 서로 사회인이 된채로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학교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기란 많이 힘든 일인 것 같다고.
이렇게 기존 일상이 미뤄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갈 때 새로운 책이 주어졌다. 그리고 제목은 현재의 나와 정 반대의 제목인 <침묵의 대화>. 하루종일 참 많은 말을 해야 하는 나에게 침묵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첫 회개로 생긴 풋열정이 가라앉고 나면 예전의 유혹이 되살아난다. 영적 여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면 처음의 열정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말하자면 복음의 가치를 선택한 뒤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인 행동 동기를 직면해야 한다.” (p. 19)
적응이 빠르다는 건 어찌보면 독이었다. 모든 에너지를 새로운 곳에 쏟느라 기존의 것을쉽게 손 놓아버린다는 의미였으므로. 그렇게 빠르게 순응해버리고 빠르게 바래갔으며 적응이라는 이유로 쉽게 변질되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유한한 것들은 변질되거나 익어가거나 둘 중 하나라는데 아무래도 깊이가 없어 이리저리 채이기만 했던 나는 전자였나보다, 그렇게 쉽게 저버릴 얄팍함이었다면. 그렇게 빠르게 잃어버렸던 것은 정반대의 속도로 돌아가서 다시 가져와야만 했고 적응이라는 말 아래에서 쉽게 당연해져버렸다. 자포자기인줄도 모르고.
“타인의 욕구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아보고 그에 반응하는지는 우리의 내적 자유와 정비례한다.” (p. 43)
“그러므로 어린이의 단순성, 천진난만함, 지각 대상에 매료되는 것, 감각 경험에 대한 직접성 등은 전 생애를 통해 유지해야 할 자질들이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발끈하는 성미와 무지만은 버려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의 모험 정신, 자기 정체성과 관계성의 탐색 등은 전 생애를 통해 지켜야 할 가치들이지만, 사춘기의 정서적 혼란과 자기 주체성 확립에 따르는 불안감만은 버려야 한다.” (p. 77)
타인의 무질서하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 반응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부분들만 도려내고 깔끔한 것들만 직면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줄 알면서도 많이 그러고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적어도, 그 안에 담긴 욕구를 이해해보자고, 노력이라도 해보자고 다짐해본다. 그런데 그러려면 적어도 타인이 주는 화살이 나를 향한 것임을 알고 또 그에 걸맞는 방패를 매일 세워야 하는데, 그것을 갱신하는 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내 옆에 당신이 있다는 걸 잊지만 않는다면 두려울 것은 없는데도.
“나는 이 사람보다 더 햇살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버니처럼 삶을 그렇게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삶의 선함에 대하여 그렇게 철저하게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그는 곧바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진정한 초연함이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놓아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은 모두 놓아 버리는 것이다.” (p. 90)
“겸손은 자신의 나약함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신뢰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다.” (p. 113)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말씀이 예전처럼 많이 와닿지 않음은 아무래도 그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에 더이상 그 단계가 효력을 다한 것일까. 냉랭해진 마음을 다시 데워보려고 애꿎은 퇴행만, 뒤로가기만 했는데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지. 결국 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믿는다는 건 맡기는 것이지, 유아퇴행을 하라는 게 아니라는 것. 어떻게 보면 믿는다는 건 생각의 일부분을 외주주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외주를 주고 따르는 것이 겸손이고.
“완전히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투신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은 없다. [...] 그러므로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입문하는 동기가 아니라 정진하는 동기이다. 감각의 밤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 응답을 책임지라고 하신다. 여기에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궁극적으로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응답도 포함된다.” (p. 138)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 본성을 신적 차원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인데, 이는 무슨 특별한 역할이나 빼어난 능력을 주심으로써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살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p. 155)
청계천 앞에서 근무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즉흥 버스킹을 종종 퇴근길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첩을 뒤적이다 발견한 이 날은 아마도 그 버스킹 밴드가 노래를 마치고 말했던 말이 인상 깊은 날이었던 것 같다. 꽃길만 걷겠지 싶어서 시작한 음악 인생이었는데, 걷다보니 그냥 길이었다고. 그렇다. 꽃길이 아니더라도 걸어보는 것이고, 그냥 묵묵히 걷는 게 때로는 가장 힘들지만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
결국 매일, 의지적으로, 너무 지치고 힘들어도 한발자국씩이라도 걷는 것, 비척비척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힘차게 걸어보는 것, 이렇게만 해도 되겠지 싶은 일 앞에서 그래도 저렇게 끝까지 해보는 것. 첫 마음은 퇴색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완결짓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도, 우리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의 힘으로 절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께 믿음을 두는 것이고.
지하철에서 많은 사람들끼리 복닥거리며 서 있다보면 다들 단절된 시공간 안에서 각자의 소음을 귀에 꽂고있다. 학생일 때는 그저 습관이겠거니 싶었으나 직장인으로서 보는 우리들의 모습은 뭐라도 잊어보려고 애쓰는 노력들로 이젠 보인다. 잠시나마의 도피가 필요한 것일 수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엔 지하철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런 소음이 없으니 침묵 상태이긴 하나 대화가 없는 나와 예수님 사이에서. 같은 침묵이라면 대화라도 시작해보자 싶다. 대화는 결국 상대방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그 상대방의 말을 듣고 다시 응답하는 일련의 과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걸어가는 것이 책임을 지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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