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지나쳐온 겨울을 지나온 뒤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졸업과 취업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한 상태로 연수원을 나와 내 자리가 생겨버렸다. 매일이 바쁘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알고 선택한 일이었지만, 적응을 이유 삼아 매일을 쓰러지듯 잠에 들면서 생각했다. 이러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닌데, 밀려오는 업무를 겨우 끝내고는 하루를 끝내는 것에 급급하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닌데. 작년 겨울, 1004프로젝트 연수에서 팀원들끼리 토의하는 시간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고 했던 한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직장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어때야 할까. 지치지 않고 사랑하기란 가능할까. 수습이라는 단어를 앞에 달고 근무하는 나에게 적응하는 것, 그 이외의 것의 틈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나의 마음이 닫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직업을 택한 사람들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다. 성격이 급해지고, 거절에 익숙해지고, 참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점점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보호막을 감싸고 그렇게 딱딱해지는 것. 문득 새해 다짐에 용기있게, 지치지 않고 매일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동이 필요하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기꺼이 걸어갈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감동을 받아들이고, 인생 여정을 걷는 데 지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위로를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p. 134)
지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데, 지치는 것은 쉽고 지치지 않고 꾸준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경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데, 고단한 마음으로 짜증을 내는 건 쉽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부드럽게 말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매일 읽는 복음 말씀, 매일 했던 기도들까지도 이제는 점점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쌓여만 가는 버거운 어지러움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집었던 올해의 첫 영적 독서 책은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 였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 그분께서는 [...]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집회 15, 15-19)
네가 원하기만 하면. 조금은 쫓기듯이 읽어야 했던 나의 마음을 아시기라도 하셨는지, 주일미사 1독서의 첫 문장부터가 나의 마음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최근의 나는? 연수원에서는 분명,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나는 여기서 이 방법으로 예수님의 진리를 살아갈 수 있겠다고 확신을 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것이 곧 성화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점점 일을 앞세워서 내 마음의 공간을 잔뜩 줄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분도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아니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다른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과 완전한 평화 속에 있다면, 그 답은 "아니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에도 언제나 하던 그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필요하십니다! 중
(p. 129)
언젠가 선배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지금 하는 이 일을, 이 직업을 이왕 하는 것 사랑하면 좋겠다고. 이 직업을 사랑할 수 있느냐, 이 직업을 가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불확실함으로 시작한 걸음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들이 여기가 맞다고 손짓하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서. 그런데 이제 내가 잘 해낼 일만 남아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삶은 캠핑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때때로 불편함에 부딪치지만, 이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뒤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집이고, 이 세상의 삶은 약간 불편한 캠핑 여행입니다. 천국이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을 알고 희망한다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더 쉽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p. 10)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눌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되어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부라도 되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매여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안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 그런데 그것이 이미 나중에는 충족이 될 것이고 또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그 불안함은 해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도, 위치도, 시간도 모두 나눌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음이 다칠까봐 조금만 내어주기 보다는, 어차피 없어져봤자 채워질 것이고 이 마음조차 굉장히 적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충전할 수 있는 동력은 아마 당신께 다시 돌아가는 그 발걸음이겠지.
"여러분은 자신이 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웃과 나누고, 재활용도 잘하고, 참여도 잘하고, 너그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가 필요한가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우리 삶을 헌신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회개한 다음에도, 너무나 쉽게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에 빠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매일 새롭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드린 처음의 약속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실 때에만 여러분은 세상의 공포에 맞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실천하기, '회개가 필요한가요?' 중
(p. 131)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냐고 물어보는 질문 앞에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매일, 매순간 물어봐야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루동안 내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서 내가 내린 선택들 중 하느님께 가까이 있지 않은 선택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새해 첫 날 가졌던 다짐대로 '매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단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매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제의 내가 어떤 칭찬을 받았던, 내가 어디에 근무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관계 없이. 어떻게 보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지기' 라는 말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급하게 읽어내려갔던 책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금새 다 읽힐 만큼 재미있었고, 그만큼 시의성 있고 청년만이 하고 있는 수많은 고민들을 담아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상황에서 가장 와닿았던 것은 '어떻게 하면 내 직업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뒷부분을 여러번 읽었지만, AI와 인간, 인공배아와 채식주의, 이주민과 노숙인, 정의와 정치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질문과 가톨릭에서 바라보는 답변을 명쾌하게 내려주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청년층의 고민은 단연, 비신앙이 다수인 분위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하는데 책에서 바른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단순히 답변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의 기도문을 통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배우고, <성인>에서는 관련 성인들의 이야기를, <인용문>을 통해서 교황님들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특히 <생각하기>, <실천하기>에서 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주고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점이 정말 좋았다.
이제는 다시 답변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 나는 행원으로서 모든 이에게 사랑을 주는 행원이 되겠다는 답변을 내리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 발령을 받는 날이었던 입행 축하식 날, 한 교수님께서 <말뚝들>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다. 지난 주에 문득 그 사실이 기억 나 퇴근 길 버스 안에서 검색을 했다. 소외되고 뒷전으로 밀린 슬픔들에 대한 이야기.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좁아진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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