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때로 신앙이란 특별한 체험이나 깊은 깨달음을 통해 자라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피정의 은총, 강렬한 회심, 혹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들이 믿음을 만들어 준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은 오히려 아주 평범한 하루 속에서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다 산만해지고,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며 다시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인 수녀의 『해인의 바다』는 한 수도자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가장 솔직한 기록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책의 부제인 ‘영혼의 일기’는 책 전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1976년, 종신 서원을 마친 젊은 수녀이자 시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던 이해인 수녀의 내면이 계절의 흐름을 따라 펼쳐집니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기록된 글들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자 독백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영적 대화입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이해인 수녀’의 모습과 이 책 속 젊은 수도자의 모습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녀 시인이라는 이름에서 늘 평온하고 맑은 영혼을 떠올리지만, 이 책 속의 그는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자신의 느린 성격을 고민하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교만을 부끄러워합니다.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받는 존중 앞에서 두려워하고,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오히려 깊은 위로로 다가옵니다. 완성된 성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우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은 뜨거운 신비 체험의 언어라기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한 영혼의 다짐처럼 읽힙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도 생활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해인 수녀의 기도는 놀라울 만큼 솔직합니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관계 안의 서운함과 두려움까지도 숨기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놓습니다. 그러한 기록들을 따라가다 보면 기도란 완벽한 말을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 앞에 가져가는 일임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또한 『해인의 바다』를 관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상징은 제목처럼 ‘바다’입니다. 광안리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기도의 공간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로 등장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쓰고, 계절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그의 시선은 평범한 일상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수박을 파는 아낙네들, 옥상의 도라지꽃, 거리의 간판들까지도 모두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서, 세상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한 장소가 됩니다.
이러한 점은 이냐시오 영성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태도,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성찰하며 하느님의 움직임을 읽어 가는 과정이 이 책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해인의 바다』는 단순한 일기집이나 산문집을 넘어, 한 사람의 영적 식별의 과정을 함께 따라가는 경험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최근의 기록들은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반세기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삶을 경이로 바라보고, 사랑을 배우며, 깨어 있으려는 태도는 신앙이란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익어 가는 여정임을 보여 줍니다.
이 책은 빠르게 읽기보다 하루에 몇 쪽씩 천천히 머물며 읽고 싶은 책입니다. 어느 문장은 기도가 되고, 어느 문장은 묵상이 되며, 또 어떤 문장은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이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이들, 혹은 신앙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 조용히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결국 『해인의 바다』는 한 시인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사랑하려 애쓴 한 영혼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를 말입니다. 그렇게 이 책은 조용히 우리를 자신의 내면으로 초대하며, 삶의 하루하루가 이미 기적이며 경이로움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교보 3021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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