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official 한 것들을 찾아서 그것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공식'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무언가의 힘이 있나보다. 자기 자신이 곧 공인이고, 한 기업에서 발표하는 것이 공식 보도이고, 한 국가에서 선포하는 공식적인 입장들, 하물며 학문의 체계에서 존재하는 각각의 공식적인 이론들. official 하다는 것이 꼭 불변하다는 것과도 같다고 선전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두 단어가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참 힘들다. 그리고 그것들이 단지 길어봤자 몇백년인 패러다임, 이념, 더 짧게는 유행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곤 하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채로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스로 아는 것 외에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사는 것조차 불가능해집니다. [...] 그래서 확실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 말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느님보다 더 믿을 만한 존재는 없습니다." (p. 40, 신앙 일반에 관하여 “신앙이 주는 분별력” 중)
선을 자신의 잣대로 파악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 잊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 각자가 전지전능했다면 우리는 분명 각자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것이고, 심판받아 마땅하다 생각되는 악인은 제거하고, 선한 사람들과 좋은 시스템만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심판받아 마땅할’만큼의 악은 무엇이고, ‘좋은’ 시스템이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우리와 친한 사람, 좋은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반기를 드는 사람을 쉽게 헐뜯고 만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선과 악이란 단순히 좋고 싫음의 감정의 표현일 뿐 진정한 선과 악은 아니지 않은가.
“’거룩함’은 ‘단단하다(sancitum)’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성인들은 영원한 축복 속에 흔들림 없이 단단한 보호를 받습니다. 반면 지상에서는 삶의 온갖 변화에 휩쓸리기 때문에 거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제가 당신에게서 벗어나 너무나도 흔들립니다. 저는 주님의 확고부동함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p. 183-84, 주님의 기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중)
진정한 진리, 불변의 진리는 있다. 다만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뿐이고, 피조물인 우리 입장에서 전지전능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부터가 우선 불가능한 전제이다. 그러면 각자가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진리는 결국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우리 각자가 정의 내린 진리는 불완전한 진리일 뿐. 그렇기에 더더욱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진리가 마치 그분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근거로 쓰인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주인도 종도, 남자도 여자도, 어느 하나 배제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p. 128-29, 12개 신조 “제 9신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중)
결국 상대주의라고 함은 이런 ‘이해의 맥락’에서 쓰여져야 한다. 패러다임으로 대변되는 그 배경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겠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이해와 성찰적 태도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5세기 경의 어떤 사람이 가족이 위독하니 빨리 와달라는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간다면 그것을 보고 ‘왜 더 빠른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느냐’며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사람에게는 말이 가장 빠른 수단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말을 타고 가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현대인의 누군가보다 더욱 절실하고 애절한 마음가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탐욕은 분수에 맞는 생활에 대한 불만, 또 자기 분수와 형편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욕망을 말합니다. [...] 이런 열정 탓에 정신에서 벗어나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 주님께서는 맛있는 것, 다양한 것, 정선된 것을 청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당장 없으면 살 수 없고, 누구나 먹는 식량인 빵을 주십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p. 201-02, 주님의 기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중)
“사람이 하느님께 스스로를 바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으니, 이제 무엇을 바쳐야 할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 의도에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악한 의도로 행하면 악한 일로 돌아서고 맙니다. [...] 우리 행동의 모든 의도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p. 269, 두 가지 참사랑의 법 “하느님 사랑에 관하여” 중)
아무리 좋은 의도를 한 80% 쯤 섞어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늘, 까보면 거기에 나머지 '나의 욕심'이 들어가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우쭐해지고 싶고, 그리고 그마저도 아주 잘 포장해서 부족한 '척'하는 가짜 겸손이 다들 조금씩은 있나보다.
나름의 회심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지냈을 당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나는 은연중에 나의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이해하고, 말했던 것 같다. 과거에는 이런저런 잘못들을 하였으나, 현재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며 과거의 나를 말에 올리기도 싫은 죄인으로 만든 다음, ‘완전히 달라진 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곧 ‘발전’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의 모습도, 그렇게 후회할만한 선택을 했었던 그 모든 순간들 또한 ‘나’ 였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해성사의 목적이 ‘하느님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라는데, 나와 화해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그 기억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래야만, 그 때의 부족했던 모습들도 ‘나’라고 인정할 수 있고 또 그조차도 용서받았고, 시작부터 영원까지 사랑받고 있음을 더 깊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약점을 인지하는 ‘겸손’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 4,7)
인내와 보상의 차이는 ‘바라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다. 바라지 않기 위해서는, 선물로 받은 이 구원을 끊임없이 기억해야겠지. 결국 그것을 잊지 않아야만, 그리고 그 겸손을 통해서만 스스로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즉 언제든지 죽도록 후회했던 선택들을 했던 나로 돌아갈 수도 있는 약점을 가진 ‘나’임을 깨달아야만, 늘 다시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그 힘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나’라도 사랑해주신다는 그 기억으로.
“사실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이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 우리를 사랑신 나머지 (인간적인) 죽음마저도 물리치지 않으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은혜를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p. 78)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 한 때 푹 빠진 적이 있었는데, 대체로 한쪽이 다른 상대를 위해 높은 자리 혹은 어떤 좋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서 그것들을 포기하고 낮은 자리의 상태에 있는 상대방을 선택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 나름의 ‘흥행 공식’인 듯하다. 사실 상대방을 정말 한 인격체로서 사랑한다면, 어떤 번쩍이는 선택지들이 몰려와도 그 사람을 선택하는 희생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이 가장 ‘순애’ 그 자체 아닐까? 예수 성심 성월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시기를 떠올릴 때마다 ‘다 알고도 선택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가 없어진다. 배신 받게 되는 결말과, 인간으로서 고통을 가장 최극단까지 느끼기 위해 모든 감정과 고통과 느낌의 최고 단계까지 모두 느낀 다음 죽음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그 결말을 ‘알고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인간이 되어서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느끼기’ 위해 오셨고 또 고통을 통해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고통의 목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 이건 좀...’ 하고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하느님의 계획을 ‘다 알고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대체 얼만큼의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모르고 일단 선택한 다음 어쩔 수 없이 그 선택을 무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행동과 그 마음이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 다 알고 있지만 피하지 않는 용기, 그 일치를 통한 완성.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파견된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성공할 것을 보장받아야만 그제서야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걸음을 옮기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서 하는 것. 그 결과로 예수님의 죽음과 닮은 결과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대히 한발짝 더 나아가는 것. 세상이 싫어서 도피하듯 성당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들과 이웃들의 지치고 날 선 마음들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가는 것.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아무 까닭 없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 자식들을 하릴없이 지으셨나이까?”(시편 89,48 참조)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짐승들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p. 195, 주님의 기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중)
어찌보면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 10,10) 하심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은 못 받을 수가 없다는 의미이고, 못 받은 것은 거꾸로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한’ 일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따리와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구태여 챙기는 것은 스스로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지 않아서 스스로 확신이 안서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도피처나 핑계 댈 수 있는 보호막을 거두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의로움이고, 빛이자 소금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태도일테니까.
“’우리’라는 말에는 이웃에 대한 책임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데에도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p. 180)
사실 많이 어렵긴 하다. 명동대성당 교중미사처럼 한시간을 기다려 입장하려고 할 때 슬쩍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애써 해놓은 결과를 누가 홀라당 가로채버리면 분노가 일고, 신자임을 이용해서 ‘이렇게 해도 넌 복수하지 못하잖아’하며 막 대하는 사람을 보면 허탈함이 밀려온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손해보고 싶지 않을 때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지고 나 혼자 이렇게 한다고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긴 할까 싶을 때, 한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을 떠올려야겠다. ‘어차피 죄인들의 모임’인 것이라고, 나 자신도 죄인이고 그것이 설령 수도자더라도 죄인이고 다같이 완벽하지 않은 죄인들인데, 다만 용서받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고, 그 용서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그것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회심을 하고 성당에 나가니 죄인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고 궁금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자신이 나약하지만 용서받았음을,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배운 것을 나눠줄 수 있는데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대체 어떤 이웃 사랑을 나눠줄 수 있을까, 싶었다.
“성인이라 해도 사소한 죄에조차 빠진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로도 입증된 사실입니다. 성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해야 하고, 이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즉 우리 모두 자신이 죄인이요 빚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이라면 마땅히 두려움과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p. 208, 주님의 기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중)
머리로는 실천하고자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 알면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 그런 태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무게를 가진 말인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이 정의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저 기도문을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그 지향대로 스스로가 바뀌고 실천할 수 있게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그런 단편적인 의미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순교 성인들,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 시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몸바친 사람들,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을 다시 보니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참으로 무거운 말이고 쉽게 쓰일 수 없다는 말임을 깨닫는다. 그저 단순히 세상이 ‘싫어서’ 등지는 선택들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기꺼이 내던지는 선택들. 어떤 조건들이 부정된 상태에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그 부정된 조건들이 긍정으로 주어져도, 온전히 자유의지로 스스로 그 조건들을 내려놓는 것. 다시 말해 세상의 논리로 더 좋아보이는 조건들-돈과 명예와 권력들-이 모두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봉헌의 참된 의미임을 깨닫는다.
“아이가 부모를 따라 하듯 우리도 그분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 해야 합니다. [...] 하느님을 따라 하는 데에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내적인 것,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1-2)” (p. 178-79,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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