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메시지,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성경 이야기

희망의 메시지,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때로는 수치스럽고 때로는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하지만, 그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2025.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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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숨바꼭질을 할 때면, 술래가 나를 찾아낼까 봐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숨조차 죽이며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술래에게 들릴까 봐, 한없이 긴장했던 그 순간들. 성경에서도 하느님과 사람이 숨바꼭질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술래이십니다. 그분이 사람을 찾아 나서실 때 사람은 수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숨어 버립니다.

 


 

정말이냐?”

이 이야기는 뱀이 여자에게 던진 한마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3,1)

이 질문은 주 하느님이 이전에 사람에게 하신 말씀(2,16-17 참조)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입니다. 뱀은 교묘하게 주 하느님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여자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대답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3,2-3)

 

여자의 대답에서 두 가지 차이가 눈에 띕니다. 첫째, 주 하느님께서는 먹으면 안 된다.”(2,17)고 하셨지만, 여자는 만지지도 마라.”고 덧붙입니다. 둘째, 주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17)라고 단호히 경고하셨지만, 여자는 이를 죽지 않으려거든으로 완화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왜곡시킴으로써 여자는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듭니다. 뱀은 이 빈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뱀은 여자가 완화한 사형 선고를 다시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3,4-5)

뱀은 그를 주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자도 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뱀이 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주 하느님과의 분리나 거리감을 암시하며, 여자는 뱀과 그 관점을 공유합니다. 마침내 여자는 뱀의 말을 받아들여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3,6 참조).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원을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사람의 소명입니다(2,15 참조). 사람의 운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이 특별한 피조물에게 정원을 돌보게 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허락입니다(2,16 참조). 하느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사람이 먹도록 허락하십니다.

세 번째는 금지입니다(2,17 참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으면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는 자에 대한 조건 없는 순종을 기대합니다.

주 하느님의 마지막 금지 조건에 대한 뱀의 대담한 해석은 이 세 가지 조건의 균형을 깨 버리고 인간 삶을 왜곡시킵니다. 믿음과 순종의 이야기(2)가 이제 범죄와 처벌의 이야기가 됩니다(3).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

너 어디 있느냐?”(3,9)

동산의 나무 열매를 먹은 후,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립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당신의 피조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눈을 피해 숨었지만(3,7-8 참조), 그들은 주 하느님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주 하느님의 질문에 사람은 변명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이 대답은 더 심각한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그들에게는 마치 재판과 같은 장면이 이어집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질문자가 됩니다. 이 남녀는 나는 들었고 …… 나는 두려웠고 …… 나는 알몸이었고, …… 나는 숨었고 …… 나는 먹었습니다.”(3,10.12-13 참조)라는 대답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폭로합니다. 남자는 주 하느님보다 여자의 말을 따랐고, 여자는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는 여기에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3,12)라는 변명을 덧붙임으로써 그 책임을 여자와 주 하느님께로 돌립니다. 주 하느님은 뱀에게 묻지 않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선고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의 선고

주 하느님께서는 우선 뱀, 여자 그리고 남자의 특정 행동을 제약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선고를 내립니다. 각각에 대해 선고된 운명, 형벌은 주 하느님에 의해 약간 다른 방식으로 미묘하게 표현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 직접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어야 합니다(3,14 참조). 뱀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관계가 됩니다(3,15 참조). 여자는 임신과 출산으로 고통받고 남자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3,16 참조).

땅은 남자 때문에 저주를 받았지만(3,17 참조), 남자는 주 하느님께 직접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는 저주받은 땅에서 얼굴에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3,17-19 참조). 창세기 128절에서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라고 인간을 축복하셨던 주 하느님께서는 이제 동물과의 적대감, 출산의 고통, 인간에게 쉽게 굴하지 않는 땅이라는 잠재적인 장벽을 인간들에게 만드십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다

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동산에 두셨는데(2,8 참조), 이제 그와 그의 아내가 동산에서 쫓겨납니다(3,23 참조). 이것은 316절에서 19절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특정한 부분을 제한하는 처벌과는 다릅니다.

 

에덴동산에서 내쳐지는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2,4-25 참조). 동산은 인간 공동체의 맥락으로 존재합니다. 동산의 자리는 연대, 신뢰, 행복의 약속된 인간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동산에서 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느님의 조건에 따라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살았던 인간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제 사람은 땅에 의해 제한된 지상의 존재로, 주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 사람은 주 하느님이 없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아는 능력에서 하느님과 같아졌으므로, 그들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도 주어지지 않습니다(3,22.24 참조). 지혜와 영원한 생명은 신성의 고유한 두 가지 특성이므로 영원한 삶은 사람에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창세기 217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놀랍게도 남자와 여자는 즉시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삶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기적은 그들이 죽음 대신에 벌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동산에서 쫓겨난 그들은 동산의 선함과는 별개의 삶, 고통과 땀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보호받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십니다. 314절에서 19절에서 형벌을 선포하고, 323절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사이에 321절에서는 주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서만 사용되어 온 히브리어 만들다, 하다라는 동사로 주 하느님이 가죽옷을 손수 만드시는 것을 묘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의 피조물을 동산에서 쫓아내기 전에 그들에게 행한 마지막 행동은 보살핌과 관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옷을 입힘으로써 그들의 수치심을 가려 주십니다(3,21 참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창세 37,3.23.32; 2코린 5,4 참조). 삶은 계속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찾으신다

이 이야기에서 선포된 하느님은 불순명하는 자를 처벌만 하는 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내지만, 그들에게 생명을 남겨 두고, 그들에게 동산 밖에서의 소명을 주심으로써(3,23ㄴ 참조), 그들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창조주는 그의 피조물을 멀리 두면서도 보호하고, 보호의 행동은 그들의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아무리 찾아도 상대가 끝까지 나오지 않으면 게임이 끝나지 않듯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수치스럽고 때로는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해 숨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너 어디 있느냐?” 여전히 숨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드러내고 그분과 대화를 할 것인가는 우리 선택의 몫입니다.

 

Profile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합니다. 저에게 성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만나며, 그 모든 답이 하나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여정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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