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신비,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음

신학 칼럼

환희의 신비,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음

첫 번째 여정 |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를 걷는 순례

202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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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묵주 기도, 순례자의 나침반> 시리즈의 아티클로, '묵주 기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례의 여정'에서 이어집니다.

 


 

 👣 첫 번째 여정 가이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께서는 환희의 신비에서 복음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십니다.‘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지닌 궁극적인 이유와 그 심오한 의미, 즉 강생의 신비를 바라보며, 구원을 위한 고통의 신비를 어렴풋이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 여정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결을 깨닫도록 이끄시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evangelion)”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나를 되돌아봅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는 아쉽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으며,

한없이 부끄럽고 부족한 나.

 

나는 언제 기뻐했는가?’, ‘오늘 하루,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했는가?’ 고민이 잇따릅니다. 하지만 기쁨은 쉽사리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쁨의 여정을 시작하려는 우리의 순례도 기쁨과 환희보다는 고뇌와 걱정이 앞섭니다.

 

어디에서 기뻐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그 환희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인간이 되신 하느님1 | 사랑이신 하느님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예수님 유년 시절의 일들을 바라보는 순례입니다. 이 순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굳이 인간이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 한마디로 엄청나게 큰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바다를 두 쪽으로 가르십니다. 그런 분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로 오셨습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먹을 수도,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같은 것을 느끼고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을 함께 겪고 싶어 합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아프고 슬픈 일도 함께 아파하면서 위로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삶 한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2 | 위로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로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사랑과 믿음, 희망을 가진다면 그 고통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알려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겁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통해 우리는 고통과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인간이 하느님이신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공감의 사랑과 위로의 희망을 찾아갑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46-53 참조)

 

성모님께서는 그런 강생의 신비를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순례에 여정에 함께하시며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배 안에 품으시고 노래합니다.

 


 

비극의 반전 드라마1 | 마음속에서 곰곰이 생각하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알려 줍니다. 누구에게나 임신 소식은 축복이자 기쁨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마음 안에서 순수하게 기뻐하실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의문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에게 되물어 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그 물음은 성모님의 온전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천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소식에 순명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약혼자는 자신을 배신자로 여기고 부모님은 실망하며 좌절할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이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천사가 전하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하십니다. 그 생각은 바로 기억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기억,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에도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하시며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고통의 이유, 선택의 이유, 그리고 사랑의 이끄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두려움과 걱정, 고통과 억울한 상황을 바꾸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와 보살펴 주실 거라는 꺾이지 않는 희망 안에서 그 비극을 희극으로, 기쁨으로 바꿉니다. 그것이 성모님의 기쁨입니다.

 


 

비극의 반전 드라마2 | 예수님 탄생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사건(루카 2,19.52 참조)예수님을 낳으셨을 때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떠나는데, 그 여정 또한 비극입니다. 두 사람은 낯선 곳에서 아늑한 방도 없이 예수님을 출산합니다. 기쁘고 행복하며 축복받은 탄생은 아닙니다. 축하해 주는 이는 보잘것없고 신분이 비천한 목동들뿐입니다. 하지만 그 목동들은 천사의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제 성모님은 자신의 기억 속에 또 하나의 사랑과 은총을 쌓아 갑니다. 잉태의 순간에 쌓였던 하느님의 기억 위에 예수님을 품에 안았을 때의 기억이 더해집니다. 더 나아가 파스카 축제 때 성전에서의 잃어버림도 비극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려는 은총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발견하고 간직함을 통해 희극으로 바꾸십니다.

 

온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소소한 기쁨 속에 언제나 걱정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그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프고 힘든 지금의 여정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겨서 그 기쁨을 찾지 못합니다. 때로는 더 가지고 싶어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서 자신의 것에만 시선을 돌리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그분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바라보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고민과 생각은 언제나 하느님께 맞춰져 있었고, 시메온의 자신의 비극적 예언(루카 2,34-35)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설사 성모님께서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확신 안에서 희극적 환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를 통해 순례에 동참하는 우리들도 기쁨의 삶은 기억을 통한 감사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서로의 신비를 바라보며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계속 의심하고 또 다른 걱정들을 밀려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위로와 용기를 위한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합니다.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임신한 연약한 여인 혼자서 그 먼 여정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여정을 성모님은 떠나십니다. 그 여정의 결론 신비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대사제의 아내입니다. 유다인들 사회 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존경받는 대사제의 아내입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지혜롭고 존경받는 여인으로 인정받았을 겁니다. 그런 여인이 쉽지 않은 여정을 끝내고 온 초라한 소녀를 만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치며 극진한 대우를 합니다(루카 1,42-45 참조).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외형이 아닌, 자신의 권위와 바람이 아니라 마리아의 품 안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사벳의 바라봄은 성모 마리아 또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서로가 상대방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과 신비를 발견하는 순간 그 만남은 기쁨과 환희로 바뀝니다. 성모님이 길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과 조그마한 불신의 마음은 사랑과 확신으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자신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59 참조)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Profile
광주대교구 사제. 가톨릭목포성지 담당으로 한국레지오마리애기념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일상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나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과 순례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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