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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특집 ‘기다림’
💭 1. 기다림이란 도대체 뭘까? 기다림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에요. 그 안엔 설렘, 그리움, 희망이 한데 섞여 있죠. 💫 어린 시절, 산타를 기다리던 그 마음. 바로 그게 ‘대림의 마음’이에요. 🎁
⏳ 2. 기다림 = 시간의 신비! 기다림은 ‘빈 상자’ 같아요. 아직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안엔 이미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들고 있어요. ‘크로노스(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하느님의 시간)’를 발견할 때, 기다림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 돼요. ⏰💫
🙌 3. 그래서 대림은 ‘희망의 연습’! 기다림은 단지 참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이에요. 매일의 기도, 작은 사랑 한 조각, 따뜻한 말 한마디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서 있는 거죠. 💖 |
기다림이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오래된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림 속에는 설렘이 있고, 때로는 막연한 그리움이 있으며, 그 모든 순간이 지나면 조용히 마음속에 남는 한 줄기 여운이 있습니다.
첫 번째 | 추억 속의 한 장면
처음 ‘설레는 기다림’을 경험했던 것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들었던 그 흥미로운 이야기는 어린 마음에 커다란 기대를 심어 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마음이 들떠 있었고,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커다란 빨간 양말을 트리에 걸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양말 속 선물을 보았을 때의 그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눈이 내리던 그 시절의 성탄은 제 마음 깊숙이 ‘기다림이란 얼마나 설레는 것인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 기다림을 깊이 느꼈던 때는 유학 시절이었습니다. 유럽의 학기는 10월에 시작해 이듬해 6월까지 이어지는데, 그 긴 시간 속에서 성탄과 부활 때의 짧은 방학에만 숨을 고를 수 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낯설던 첫해 겨울, 저는 그 짧은 쉼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때의 기다림은 단순한 설렘이 아니라, 쉼과 회복 그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마음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다림이 그렇듯 시간은 지나고 나면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기에, 기다림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감정인 듯 보입니다.
두 번째 | 영원에 가닿는 신비
기다림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상자와 같습니다. 빈 상자는 매 순간 우리에게 도착해, 우리의 사건과 선택으로 채워지지만, 채워지는 순간 흘러가 버립니다.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흐르며 그때그때의 상자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과거는 기억이고, 현재는 주시이며, 미래는 기대”라고 말했습니다.* 기다림은 바로 이 미래의 차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마음을 두며 그 안에 의미를 새기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단순한 설렘이 아니라 시간의 신학입니다.
* 아우구스티노에게 시간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입니다. ― 《고백록》 11장 참조.
이 기다림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의 시간에 연결됩니다. 대림은 단지 축제를 준비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대림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조용히 비우며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비어 있는 상자의 안은 이미 오고 계신 주님의 현존으로 서서히 채워지고 있습니다. 결국 기다림은 흘러가는 시간, 곧 ‘없어지는 시간(크로노스)’을 통하여 사라지지 않는 시간, 곧 하느님의 ‘카이로스’를 만나는 일이 됩니다. 크로노스의 흐름 속에서 카이로스의 순간을 발견할 때, 기다림은 더 이상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영원과 맞닿은 신비가 됩니다.
세 번째 | 주님의 오심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다림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그분께서는 2천 년 전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세 번의 오심으로 파악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오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육신으로 오셨고, 두 번째, 곧 중간의 오심에서는 영과 권능으로 오시며, 마지막 오심에서는 영광과 위엄으로 오실 것입니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Sermo 5》, 주님의 오심 안에서(in Adventu Domini)
첫 번째 오심은 이미 과거의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재림은 언제일지 모르는 먼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 사이의 시간 즉,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 세 번째 오심을 우리 안으로 조용히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 응답하고 포착할 수 있는 남다른 순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 기다림은 단순히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마음의 문을 언제나 두드리고 계십니다.
네 번째 |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단순히 미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이러한 카이로스의 신비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때(카이로스)’는 흘러가며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역사에 들어오시는 충만한 순간이자 결정적인 구원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면, 그 나라는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 자체입니다. 그 만남 안에서 삶은 새로워지고,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변모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영원성은 우리의 현재로 쇄도하고, 모든 것은 새롭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다섯 번째 | 희망
대림 시기의 기다림은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여정입니다. 메시아께서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를 향한 기대와 설렘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감각은 다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대림은 기다림의 연습입니다. 하느님 나라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해 깨어 있음을 배우는 기회입니다. 깨어 있음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닙니다. 시간 안에서 하느님을 맞이하는 존재로서의 태도이며,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습관입니다. 이 기다림은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희망을 잇는 현재의 신비 속에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결코 오지 않을 어떤 날에 있지 않습니다. 아주 먼 훗날의 유토피아도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희망은 바로 오늘을 향합니다. 지금이 그 순간입니다. 하루하루가 다 그렇습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의 때일 수 있습니다.”*
* 발터 카스퍼,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 생활성서사, 45쪽.
매일의 기도와 작은 사랑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먼 재림의 때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일상 안으로 오십니다. 우리가 그 기다림의 설렘 속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초대할 때, 우리의 오늘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문턱이 됩니다. 그리하여 기다림의 시간은 단순한 준비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을 품은 ‘지금 이 순간’이 됩니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기다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기다림은 시간의 완성자이신 그분을 초대한 오늘이며, 아직 오지 않은 분을 향해 마음을 여는 우리의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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