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④ 변하지 않는 질문

가톨릭 예술

월간 특집 ④ 변하지 않는 질문

현대 영화의 클래식, 고다르의 <알파빌>에서 읽는 인간적 삶

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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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를 클래식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진리를 전합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그런 고전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의 신앙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영화는 시대의 감수성과 인간의 고민을 그려 왔습니다. 장뤽 고다르의 <알파빌>은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성과 기술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다른 영화들 속에서 되풀이되며,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에서 예술을 의미하는 ‘Art’‘Ars’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수공’, ‘기술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τέχνη(테크네)’를 번역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예술은 고고한 인간 정신의 발현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출발은 기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서양에만 국한된 생각이 아닙니다. 동양 예술의 철학적 기반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평가받는 고전 《장자(莊子)》에서도 예술적 경지란 숙련된 기술을 지닌 사람이 절대적 자유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예술이라는 단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기교의 충실함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은 기교적 충실함을 바탕으로 삶의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삶의 기술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그 순간일 것입니다.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순간에는 살아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실감은 오히려 삶과 생명이 위협받거나 사랑이 좌절되는 고통 속에서 더 깊이 찾아옵니다. 고통의 순간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우리 앞에 던져지게 마련이며, 삶의 기교적인 충실함이 바로 그 질문의 무게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예술 작품에 부여되는 이름, ‘클래식의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클래식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예술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술가가 경험한 강렬한 살아 있음의 순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감으로 이어질 때, 그 작품은 비로소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오래전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뇌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존적 고민과 맞물리고, 그 옛날 예술가가 마주한 감정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세대가 느끼는 감정과 엮입니다.

 


 

영화 <알파빌(Alphaville)>이 던지는 질문

 

클래식의 이와 같은 의미를 바탕으로,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이자 영화의 혁명가라 불리는 거장 장뤽 고다르 감독의 1965년 작() <알파빌(Alphaville)>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빛의 문명을 표방하는 가상의 도시 알파빌이 배경인 SF 영화입니다.

 

 

<장뤽 고다르(감독). (1965). 알파빌[영화]. Pathé Contemporary Films>

 

알파빌은 중앙통제기구 역할을 하는 컴퓨터 알파 60’이 인간의 사고와 의식을 지배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통제가 가능한 수준의 평균 지능만 가지도록 허용되며, 평균 지능을 넘어서는 사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처형당하거나 통제 구역에 수용되어 감시와 치료를 받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통제된 도시 알파빌에 외부 국가의 비밀 요원 레미 코숑이 잠입하는 이야기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의 비밀 임무는 알파 60의 설계자 폰 브라운 박사의 전쟁 음모를 저지하는 것입니다.

 

알파빌은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통제합니다. 알파빌에서 성경이라 불리는 사전에서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삭제되고, 인간 의식을 통제하는 단어들이 새로 추가됩니다. 사람들은 삭제된 단어들을 잊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은 잃어 가며 저는 잘 지내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같은 기계적인 말만 되풀이합니다.

 

알파빌에서는 언제나 논리만이 강조됩니다. ‘라는 질문은 철저히 금지되고 왜냐하면이라는 인과만이 허용된 알파빌에서 사람들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복종합니다. 감정과 사유는 억압되고 논리와 결과만 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관능이 허락되고 사랑은 금지됩니다. 더불어,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의 복잡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알파빌에서는 중죄에 해당합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탄하거나, 탄식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중앙통제기구 알파 60은 주민들이 감정과 상상을 버리고 오로지 계산된 반응과 효율만을 추구하도록 강요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질문

 

영화 <알파빌>이 그리는 극단적인 미래 세상은 21세기의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영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2021년에 개봉한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입니다.

 

<홍성은(감독). (2021). 혼자 사는 사람들[영화]. ㈜더쿱>

 

영화의 주인공 진아는 카드 회사의 전화 상담원으로, 외부와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한 채 홀로 지내며 삶의 효율을 극대화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아는 상사로부터 새로 입사한 수진을 교육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진아에게 수진은 불편한 존재이지만, 이 일이 인사 평가에 반영될 수 있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교육하게 됩니다. 한편 수진은 선배인 진아에게 잘 보이려 살갑게 다가가지만, 진아는 그런 그녀를 단호히 밀어내며 업무 외의 관계는 철저히 차단합니다.

 

하루는 진아가 줄곧 담당했던 고객의 전화를 수진이 실습차 응대하게 됩니다. 그 고객은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으로 돌아가려 한다며, 과거에 가서도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진아는 그를 정신 이상자로 분류하고 매뉴얼에 따라 형식적으로 응대해 왔기에, 수진 역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런데 수진은 그 고객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그가 왜 2002년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진지하게 묻습니다.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지던 고객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고맙다며 수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진아는 수진이 매뉴얼대로 응대하지 않았다며 타박했지만, 이 일은 진아의 마음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속 진아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우리 시대를 떠올리면 영화 <알파빌>60년 전에 그린 가상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가까워졌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시적 감성은 사치로 치부되고, 효율과 합리의 틀에서 벗어난 것들은 무능으로 평가되며, 긴 호흡으로 사태를 마주하는 섬세한 태도는 재빠른 판단과 일방적 단죄를 미덕으로 여기는 세태 안에서 도태로 상징됩니다.

 


 

끊임없이 묻고, 응답할 것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로 치부됩니다. 그렇게 장뤽 고다르가 60년 전에 상상한 세계의 암울한 면모는 어느덧 상상의 영역을 넘어 우리의 실제 이야기가 됩니다. 고다르의 예술적 야심과 더불어 미래를 향한 우려와 걱정이 일군 예술적 성과는 60년의 세월을 거슬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파고듭니다.

 

한편, 알파 60은 끝내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적 모순에 빠지고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이 대목은 영화 <섹스아이콘 우씨 오브마이어>의 한 장면이 떠오르게 합니다.

 

<아킴 본학(감독). (2008). 섹스아이콘 우씨 오브마이어[영화]. Warner Bros. Pictures(Germany)>

 

68혁명(1968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혁명 운동으로, 기존의 도덕과 권위, 초월적 질서에 맞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 세대에 속한 우씨 오브마이어는 유물론적 세계관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부정하고, 기존의 관념적·도덕적 질서를 전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 그녀는 실존의 붕괴를 경험합니다. 연인의 일탈을 목격한 절망의 순간, 그녀는 그동안 부정해 온 보이는 것 너머의 차원을 비로소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알파 60의 파괴우씨 오브마이어의 실존이 전복되는 체험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가 보여 주던 경고가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가는 지금, 우리는 다시 인간다움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클래식은 바로 그 물음을 우리 앞에 되살립니다.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비추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멈추어 성찰하게 하지요.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가장 먼저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현재 영화를 비롯한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의 소수자들을 향한 사목에 힘쓰고자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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