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교의 신학으로의 초대: 신학은 어떻게 이뤄지는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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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졸탄 알체기와 마우리지오 플릭의 교의 신학 입문서 《신학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2장의 주제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된 글입니다. ― 참조: Zoltan Alszeghy, Maurizio Flick, Come si fa la teologia, Edizioni Paoline, 1974, pp.35-60. |
옛 문장이 오늘 나의 숨결이 되기까지
미사 중에 바치는 ‘신경’이나 ‘주님의 기도’를 가만히 읊조리다 보면, 문득 그 문장들이 일상과 동떨어진 언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고단한 삶의 무게와 관계의 긴장,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저승에 가시어”라거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와 같은 표현은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의 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이 어떻게 우리 시대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지를 찾아내고 알리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문장을 구성할 때 ‘주어’와 ‘술어’를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면, 문장 구조의 관점에서 주어는 이미 주어진 토대이고, 술어는 그 주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며 의미를 드러냅니다. 신학은 바로 이 주어와 술어가 만나는 역동적인 대화 속에서 생명력을 얻습니다.
신학의 주어
= 지금 여기, “교회의 공동체적 삶”
주어는 이미 알려진 요소, 합의된 정의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은 H₂O이다”라는 문장에서 ‘물’이 지칭하는 역할은 이미 외형적 의미가 상정된 고정된 실재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고백하는 주어들은 이와 다릅니다. 이 신학의 주어들은 고정된 개념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주어들은 하느님을 살아 내는 방식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고 구체화되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삶은 언제나 한 시대의 언어와 감수성, 곧 문화를 품게 됩니다. 전례와 기도, 교리 교육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주어는 신앙의 기억과 실천이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 총체적 삶의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 문화를 단순한 사회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앙이 말하고 전하고 응답하는 이 삶의 방식을 하느님과 인간 공동체가 만나는 ‘언어적 사건’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총체적 사건 안에서 중요한 언어적 특징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학의 주어는 자기-함축적입니다. 신앙은 “저는 한 분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한 분뿐이십니다.”라는 믿음을 1인칭 시점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진술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는 행위로, 화자를 구원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이 고백은 화자를 그 진리 안으로 끌어당겨 구원 역사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둘째, 신학의 주어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희생과 어린양’, ‘몸과 지체’ 같은 표현은 단순한 개념 전달이 아니라 신비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신비는 인간의 개념으로 다 포착될 수 없기에, 교회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지성을 열어 줍니다. 미사 중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 언어는 과거를 회상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다시 현재화하는 언어가 됩니다. 그래서 상징은 신비를 설명하기보다, 우리가 그 신비를 느끼도록 우리 삶을 열어 주는 문이 됩니다.
셋째, 신학의 주어는 역사성을 지닙니다. 성경의 표현들은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세계 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나라’, ‘희생’, ‘속량’, ‘노예’, ‘십자가’와 같은 단어들은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학은 이 언어가 태어난 자리와 상황을 살피며, 그 의미가 오늘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묻습니다. 이 역사성은 하느님의 구원이 관념이 아니라 ‘사건’이며, 오늘 우리의 시간과 삶 역시 그 구원 역사의 무대가 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신학의 주어는 교회 공동체의 삶 안에서 고백되고, 상징으로 현재화되며, 역사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찾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멈춰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정식화하는 작업이 요청됩니다.
신학의 술어:
삶을 읽어내는 생생한 ‘해석’과 ‘비판’
신학의 주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드러납니다. 그 주어가 지닌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 ‘술어’의 작업입니다. 술어는 신앙 안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는 ‘해석’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점은 신앙 고백의 성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시고 신실하시다.”
이 진술들은 신앙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신학은 “이 말이 진실인가?”에서 멈추지 않고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래서 ‘사실 확인’은 ‘의미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그 결과, 신학은 실존적 고백과 삶의 태도를 이끌어 냅니다. 술어는 바로 이 ‘의미의 자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단지 설명에 머무르지 않고, 본질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사회 학문은 교회의 현실을 서술할 수 있지만,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까지 판단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신학은 신앙의 빛 안에서 현재 교회의 삶을 판단합니다. 실제 모습과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무엇이 복음의 본질이며 무엇이 시대적·문화적 현상인지를 식별합니다. 이 비판적 해석은 두 방향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는 과거를 통한 방식입니다. 오늘의 교회 생활은 성경과 전통의 빛 아래에서 점검되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한 개방입니다. 결국 신학은 과거의 신앙 표현을 오늘의 맥락 안에서 새롭게 번역하고 정식화하는 통합적 행위이며, 동일한 계시 진리가 오늘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하는 해석의 학문입니다.
생동감 있는 신학을 향하여:
삶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다시 삶이 되는 여정
신학은 왜 생동감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신학의 주어를 이미 공동체 안에서 축적된 다면체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주어를 고정된 이미지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뒤따라오는 술어를 오늘의 문화 안에서 다시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과 시대적 형식을 식별하는 비판 작업입니다. 결국 신학은 과거의 신앙 표현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의미 있게 만들고, 오늘의 질문을 복음의 빛으로 다시 읽게 하는 통합 작업입니다. 이 과정이 계속되는 한,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지던 옛 문장은 미사와 삶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신학은 언제나 생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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