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일도 많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순간 시몬 신부님의 글이 생각나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시련이라는 것은 건너가는 거래,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건너가게 하는 파스카와 같은 거래. 그래서 그 시련의 고통을 안고 주님께 한 발짝 더 다가가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을까?" 말을 하고 나서 좀 민망했지만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 고통을 이겨낸다면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여섯 신부님의 신앙여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부님들의 특별한 영성이야기? 신부님들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의 제목조차 오묘한 느낌이다. '당신의 뜻은 알 수 없네', '들리지 않는 이야기' 이야기인데 들리지 않다니 너무 시적이기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로 인한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 인한 삶의 고통,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갖가지 시련 등이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여기, 여섯 신부님들의 특별한 이야기는 보통의 신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과 신부님들도 보통의 우리와 함께,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하시고 성숙해 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뜻깊은 이야기의 세계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번 크든 작든,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한다. 눈물을 흘리며 이 고통을 가져가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묵묵부답, 어느 순간 하느님이 진정 내 곁에 계시는 것일까? 하는 의심과 함께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방황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시몬 신부님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며 고통은 우리와 하는 소통의 첫 관문이자 하느님과 가장 깊게 머무르는 시간이다'라고 정의해주신다.
시련은 실패와 동의어일까? 실패라는 말 자체가 고통이 아닐까? 흔히 아는 말이지만 고통은 겪어본 자만이 안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안드레아 신부님도 덧붙여주신다. 누군가에게서 고통의 크기만큼 신앙도 커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삶의 고통 안에서, 절망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겸손이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게 된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에는 우리의 자아보다 하느님이 더 커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존재가 더 빛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를 숨기고 산다는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얼마 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이 쓰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 <신애론>이라는 책을 읽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야고보 신부님도 읽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먼저 신부님이 쓰신 글을 읽었더라면, 신애론을 더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야고보 신부님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신 듯하다. 물론 여기에 계신 모든 신부님들이 그러하지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왜 생기는 걸까?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상대를 더 사랑했지만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행동에 상처를 입어서? 불명확한 오해로 인해? 타인이 가진 조건에 대한 시기나 질투 등, 미움이 생성되는 이유는 아마도 수만 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미움이라는 것은 발생하는 순간부터 타인을 험담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은 나쁜 감정에 빠져들고 그 미움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죄를 짓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복수와 용서'라는 단어들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용서'의 반대말은 악감정이라고 한다. 그럼 '복수'는 악감정을 계속 지니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앙심, 분노, 험담, 증오, 혐오를 우리의 마음에 가득 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폐해질 것인가? 그 미워하는 감정들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끊임없이 더할 뿐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그 지옥 같은 마음으로 살게 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용서를, 화해를 권하신다. 우리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 우리가 미움이라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시기에.
스무 살 된 조카와 대화를 하던 중, 친한 친구 중에 사제가 되고 싶은 친구가 있다고 조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대뜸 그 친구 공부 잘하냐고 물어보았다. 공부를 잘해야 신부님이 될 수 있다고 나도 모르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린 친구의 꿈을 좌절시켜 버렸다. 내가 갑자기 이 얘기를 소환하는 이유는 치릴로 신부님의 성소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희망이라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간직한 하느님께 향한 신부님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 이야기였다. 갑자기 나의 방정맞은 입과 겸손하지 못한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직 조카의 친구가 하느님을 향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사랑과 성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화의 길에는 사랑의 실천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내면을 잘 알게 되면 타인의 내면도 들여다볼 줄 알게 되기 때문일까?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일상을 살피게 되고 그 일상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기에, 그 안에서 성화의 길로 가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너무 거창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있을가 말이다. 치릴로 신부님은 방황하던 자신의 곁에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매일의 삶이 하느님을 향한 삶이었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신호를 바로 알아채지 않았을까? 부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이 아니라 매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러면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안에 우리만을 넣어 놓는 것일까? 그럼 예수님은 우리 안의 어디로 들어오실 수 있을까? 세상은 우리에게 자아를 채우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아를,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다.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을 가득 채워 둔다면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날카로운 말이 아닌 부드럽고 친절한 말 한마디가 먼저 나오는 기쁨을 알게 될지 모른다. 요셉 신부님은 공동체의 여정도 중요하지만 각 개인마다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신다. 우리 안에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우리의 일상에서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는 기도생활과 성사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항상 깨어 있는지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살펴볼 줄 안다면 공동체 안에서의 삶도 충만해 질 것이라고 말이다.
겉모습만 바꾼, 자주 반복되는 실수 앞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럴까?'라고 자책한다. 그뿐인가? 지나간 일들에 대한 자책,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실패로 인한 자책, 갑자기 생기게 되는 나쁜 일들에 대한 자책,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자책이 물밀듯 몰려온다면? 혼자 지내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혼자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좋든 싫든 모든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기분에도 한 가정 안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요한 신부님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어떤 한 사람의 선함과 악함으로 또 다른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신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너도 저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았소?'라는 말을 듣자마자 세 번이나 아니라고 부인하며 예수님을 배신한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어보신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한 인간 베드로는 자신의 온 삶을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주님을 위해 내어 바친다.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을 책망하기만 하고 예수님을 회피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을까? 한 분의 선함이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까지 우리는 몰랐을 지도 모른다.
여섯 분의 신부님은 공통적으로, 시련은 우리가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라고,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우리 자신을 파멸하게 두지 않으신다고,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손을 잡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우리를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고 이야기해 주신다.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하루의 시간, 매 순간마다 주님께 뛰어가 보면 어떨까? 심박수가 빠를 필요도 없다. 심박수 분당 60 정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한순간, 기도로서 주님께 나의 일상을 바친다.
질문 1. 나의 선함이나 악함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적이 있나요?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