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길을 따라가는 것<조선 순교자록>

📚서평

순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길을 따라가는 것<조선 순교자록>

주님사랑 아녜스

2026. 10. 20
읽음 6

순교자 성월 9월은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특별한 달이다. 세례 후 신앙생활을 피동적으로 하며 열심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만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하느님과 오랜 시간 소원했는데 ‘하느님이 아직 나를 기억하실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또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간 성전에서 "하느님, 저 왔어요. 저 여기 있어요."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고는 침묵과 교요 속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견진 교리를 신청했고 견진 성사와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혼배성사를 순교자 성월에 받았다. 요즘은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공동체 봉사도 하고, 영성 서적도 읽고 있지만 ‘순교’라는 단어 앞에서는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순교자(殉敎者)는 ‘천주님의 가르침을 죽기까지 따르는 자’이다. 도대체 천주님의 가르침을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떤 힘이었을까? 그 힘의 뜻을 이해한들 나는 그 길로 걸어갈 수 있을까? 성총(은총)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성총은 기도와 성사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신앙 선조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란 ‘천주님과 친밀한 대화’라고 말한다. 옛 신앙인들은 이 친밀한 대화를 밥 먹듯 아니 숨을 쉬듯 했을 것 같다.

어느 신부님의 기도는 언제 하는지에 대한 말씀에서 길 가다 노끈을 보면 예수님께서 포박당하신 것을 묵상하고, 가시 넝쿨을 보면 예수님이 가시관 쓰심을 묵상하고 하늘을 보면 하늘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방법으로 하는 기도가 숨 쉬듯 하는 기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선 순교자록은 프랑스 교회사가인 아드리앙 로네 신부가 쓴 <한국 순교복자전>과 폴 데통브 신부가 쓴 <병인년 순교자>를 엮은 책이다.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시기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79위 순교자들, 병인박해(1866)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던 사실을 당시 선교사들이 보고 남긴 조선 신자들의 신앙생활 이야기의 기록이다.

 

P47- 

형리들은 우선 그들을 주뢰 틀었다. 주뢰에는 트는 모양에 따라 가위 주뢰와 줄 주뢰가 있다. 가위 주뢰는 두 무릎과 두 발목을 단단히 잡아매고 정강이 사이로 막대기 두 개를 넣고 양쪽에서 한 가닥씩 잡아당겨 뼈가 활등처럼 구부러지도록 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줄 주뢰라고 하는 것은 두 발목을 맞잡아 매고 두 정강이 사이에 굵은 나무토막을 끼운 다음 양 무릎에 바를 둘러 걸고 그것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무릎이 맞닿도록 하는 것이다. (이하 생략) 재판관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신음 소리를 내면 그것을 배교하는 행동으로 인정할 터이다.” 그들은 이호영의 살점이 헤어져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팔이 부러질 때까지 매질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 말도 내지 않았고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영웅적 인내에 맞갖은 경의를 표하려면 땅에 엎으려야 할 것이요, 그것에 맞는 상이라고는 천국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칼 밑에서 치명하기가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명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하고 1838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여섯 살이었다

박해의 시조 이호영 베드로는 기해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체포되어 4년 동안 감옥에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838에 순교하였다. 이 베드로는 이 아가타와 남매 순교자이다.

 

P45-.

전교 신부들의 서술에 의하면 조선의 감옥은 겉은 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그 담에 붙여서 죄수를 가두는 움막은 널빤지로 지은 것이었다. 복판에 남은 자리가 마당이 되고 움막에는 빛이 겨우 새어 들어갈만한 작은 문 외에는 뚫린 데라고는 도무지 없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무척이나 더웠다.

땅바닥에는 거칠고 다 떨어진 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교우들은 도둑 모양으로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씩 반찬 없는 쌀밥이나 조밥을 한 공기 받아먹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몇 주일이 지나면 아무리 건강하던 사람이라도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는 기아에 희생된 사람들을 보았다. 아! 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냐!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과 주림과 옴과 나창으로 얼굴 모습이 완전히 변해 버린 송장이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위는 전교 신부들과 1878년에 서울 옥에 갇힌 일이 있었던 리델 주교가 조선 신자들이 옥에 갇힌 불행한 모습을 보고 서술한 것이다.

 

P410-

다블뤼 주교는 기쁨에 넘쳐 있었고, 오메르트 신부는 무표정했으며 위앵 신부는 흥분해 있었다. 비통한 사형수의 분장과 팔방돌이의 절차가 끝난 후에 다블뤼 주교의 머리를 앞으로 숙여 나무토막 위에 올려놓아 고정시켰다. 망나니는 칼을 한 번 내리쳐 목덜미에 깊은 상처를 내고는 일을 끝내지 않고 사형수가 땅을 뒹굴며 온몸이 죽음의 경련을 이르키고 있는데도 두둑한 품삯을 요구하며 관리와 오랜 흥정을 했다. 죽음의 흥정이 끝나자 희광이는 칼을 두 번 더 내리쳐 주교의 순교를 끝내니 때는 1866년 성금요일 정오쯤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나이는 마흔아홉 살, 사제 생활 26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한 지는 22년, 주교가 된 지 10년이 된 때였다.

다뷜리 주교는 박해와 죽음을 예상하면서도 조선에 들어와 조선인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조선 교회를 세우는 꿈을 꾸었다. 주교의 순교 장면은 너무나 잔혹하고 혹독하다. 처형이 하루 연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반대하며 예수님의 수난에 자신을 일치하려는 마음으로 원래의 처형날인 성금요일에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두려움을 안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마음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지금 우리의 신앙과 조선시대의 신앙은 많이 다르다. 조선 순교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지켰던 그 신앙을 우리는 감사하게도 이어 받았으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 나는 신앙을 지키는 방법으로 하루에 작은 ‘순교’ 하나씩 실천해 보려고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알아주지 않는 선행 하기, 성지에 다녀온 후 순교자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 하기.

 

발제용 질문 :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실제 삶에서 무엇을 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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